현대판 카테나치오 듀오
카테나치오는 빗장이나 자물쇠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축구계에서 카테나치오라고 하면 빗장 수비를 하는 포메이션을 뜻하죠. 1960년대부터 이탈리아 주요 클럽에서 사용되다가 자연스럽게 국가대표팀까지 대표하는 전술로 자리 잡았고요. 지아친토 파케티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까지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수비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플레이였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고 했던가요. 상대 공격을 꽁꽁 묶었던 치명적인 수비도 점차 무뎌집니다. 카테나치오에 대한 공략법도 속속 등장했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정점을 찍은 이탈리아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2년 뒤에 열린 유로에서 센터백에도 반가운 얼굴이 등장하는데요. 무서운 성장세를 자랑하던 조르지오 키엘리니였습니다. 부상으로 낙마한 칸나바로 대신 마테라치나 파누치 등과 호흡을 맞추며 안정적인 모습을 선보였죠. 조국인 이탈리아는 스페인에 패하며 4강 진출에는 실패하지만, 새로운 옵션을 얻었습니다.
월드컵 2연패를 노린 이탈리아였으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졸전을 거듭하며 토너먼트 진출에도 실패합니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는 무난한 조에 편성되며 16강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고요. 꾸준히 제기된 세대교체가 역시나 문제였습니다. 쏟아지는 비난 속 유일한 성과는 보누치의 발견이었죠. AS 바리에서 견고한 모습을 자랑했던 보누치는 어린 나이였으나 당당히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뽑혀 맹활약했거든요.
주가를 높인 보누치는 유벤투스로 이적하며 키엘리니와 본격적으로 한솥밥을 먹습니다. 우수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도약했지만, 활약이 마냥 뛰어나지는 않았는데요. 오히려 바리에서 라노키아와 보여주었던 모습보다 아쉬웠다는 평가가 많았죠. 리그를 7위로 끝마친 유벤투스는 델네리 감독과 작별하고, 후임으로 콘테를 데려옵니다. 키엘리니와 보누치, 바르잘리로 이어지는 백스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죠.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황금기가 시작됐습니다. 유벤투스는 2011-12시즌 무패로 우승을 차지했고, 2년 후에는 역대 최다 승점으로 우승컵을 획득하죠. 무패 우승은 세리에에서 페루자와 AC 밀란만이 갖고 있던 대기록이었는데 세 번째의 주인공은 유벤투스였습니다. 막강한 공격은 물론 탄탄한 수비가 뒷받침되어 가능한 결과였죠. 특히 리그가 38경기로 확장된 이후에는 처음으로 나온 무패 우승이라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중앙에 보누치, 왼쪽에 키엘리니와 오른쪽에 바르잘리가 출전한 수비진은 빈틈이 없었습니다. 오른발잡이였던 보누치와 바르잘리, 왼발잡이인 키엘리니까지 균형적인 부분에서도 완벽했죠. 국가대표팀에서도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왔기에 별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이였거든요. 유벤투스의 수비진이 그대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까지 거듭났죠.
중간에 보누치는 AC 밀란으로 이적했지만, 1년 만에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와 9년 연속 스쿠데토에 힘을 보탭니다. 역시나 키엘리니와 보누치를 주축으로 한 수비진이 뒷문을 든든하게 지킨 덕분이었죠. 차세대 네스타라고 불린 루가니, 터키의 샛별 데미랄을 비롯해 1,000억 이상을 쓴 데 리흐트까지도 둘의 아성을 쉽게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부활에 성공해 순항할 줄만 알았던 이탈리아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플레이오프 끝에 탈락하며 다시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감독으로서 낙제점에 가까웠던 벤투라 대신 만치니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죠. 베테랑들이 자진하여 책임을 졌습니다. 데 로시와 바르잘리, 키엘리니가 은퇴를 선언했거든요.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자랑하던 키엘리니만이 1년 후에 은퇴를 번복하며 아주리 군단에 돌아왔습니다.
줄곧 좋은 호흡을 보여주던 키엘리니와 보누치의 클라이맥스와도 같았던 대회가 바로 유로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1년 뒤에 개최된 대회에서 조국인 이탈리아가 무려 53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거든요. 둘 다 30대 중후반의 백전노장임에도 경기에서 발휘한 영향력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보누치의 동점골 역시 키엘리니가 상대 수비수와 경합하며 공간을 창출해냈기에 가능했죠. 키엘리니가 부상으로 결장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호흡을 맞추며 아직 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키엘리니와 보누치가 보여준 우정도 가슴 뜨거웠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 트로피와 함께 웃는 모습이 SNS에 올라오며 많은 이탈리아인을 미소짓게 했죠. 유로로 인해 미뤄진 휴가까지 둘은 함께 보냈는데요. 가족까지 동반한 휴가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둘의 행복한 사진들이 계속 올라왔습니다. 이번 휴가가 중요한 이유는 월드컵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은퇴를 고민하는 키엘리니에게 보누치가 2022년 개최 예정인 카타르 월드컵까지 함께 하자며 설득했습니다. 이미 소속팀 유벤투스는 계약을 1년 연장하며 동행의 뜻을 밝혔고요.
2021년까지 어느덧 둘이 함께 뛴 경기가 326경기라고 합니다. 소속팀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말이죠. 시간으로 환산하면 무려 27,020분이고요. 보누치는 키엘리니와 오랜 시간 함께 뛰며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인간적인 유대까지 형성했다며 호흡의 비결을 밝혔습니다. 평균 나이 35살의 노장이지만 시너지 효과까지 발휘되니 아성을 넘을 선수가 없었는데요. 환상의 센터백 듀오로 이름을 떨친 둘이 카타르 월드컵까지 동행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