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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13. 2020

21


     어린왕자가 소녀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안녕.” 


    소녀가 말했다.


    “안녕.” 


    어린왕자가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 불에 타버린 버스 뒤에 있어.” 


     좀 전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한 어린 소녀가 까맣게 뼈대만 남은 버스 뒤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눈이 날카로운 소녀는 비쩍 마른 조그마한 체구에 헐렁하고 낡아빠진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넌 누구니?” 


    어린왕자가 물었다.


     “난 아까 자살하려고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있었어. 엄마가 함께 자살하자고 했거든.” 


    “그런데 왜 나를 따라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죽고 싶은지 아닌지 말이야. 그래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어.” 


    “난 네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구나.” 


    “왜? 너도 죽고 싶니?” 


    “아니.” 


    어린왕자는 잠시 생각해 본 끝에 대답했다. 소녀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넌 ‘죽음’이 뭔지 아니?”


    “글쎄. ‘죽음’이 어떤 건지는 알지만,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어.”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그럼 ‘죽음’이 뭔데?”

  

    소녀가 물었다.


    “한 개체의 모든 생명 현상이 멈추는 거지.” 


    “멈춘다?” 


    “기존의 형식과 체계가 사라지는 거야.” 


    “사라진다?” 


    소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우리 엄마는 ‘떠난다’고 하던데.”


    “그건 그저 심리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에 불과해.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고 믿고 싶어 하지. 어깨에 하얀 날개라도 돋아나서 자신의 인격이 고스란히 더 나은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중에 다시 만나요’ 같은 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서슴지 않아. 그런 가증이 죽음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는 꽤나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좀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게 사실이야.”

어린왕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죽음이란 해체되는 거야.” 


    그러나 어린왕자는 여전히 자신의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체된다.”


    소녀가 어린왕자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는 늘 아이가 갖고 싶었데.” 


    소녀가 말했다.


    “그럼 성공한 셈이구나.”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를 원한 건 아니었어.” 


    소녀가 잠시 우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원한 것뿐이지.”


    “언제나 그렇지.”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자신의 아이이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었을 거야.” 


    소녀가 말했다.


    “언제나 그렇지.”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만약 고를 수 있었다면 엄마는 나를 고르지 않았을걸.” 


    소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만약 고를 수 있었다면 나도 지금의 엄마를 고르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돼. 너라는 개체에게 가능한 엄마는 오직 지금의 엄마뿐이니까. 이론적으로 엄마는 자식을 고를 수 있지만 자식은 엄마를 고를 수 없어.”


    어린왕자의 지적에 소녀는 얼굴을 붉혔다.


    “나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었어.” 


    소녀가 울적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미리 묻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았는걸.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태어나 있는 거야. 그러면 살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지.”


    “언제나 그렇지.”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처음 정신을 차렸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0.2초 만에 모든 걸 이해하긴 했지만, 0.1초 사이에 맞닥뜨려야 했던 그 경이로움과 끔찍함.


    “엄마는 나를 사랑한대.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게 나를 위해 더 좋은 거래.”


   소녀가 작은 눈을 깜빡이며 어린왕자에게 물었다.


   “사실이야?”


    어린왕자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이 살아있는 게 더 나은 건지 죽는 게 더 나은 건지 어린왕자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살아있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죽기에는 다소 아까웠다.


    “나를 낳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소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때는 네가 없었으니까.” 


   어린왕자가 지적했다.


   “고작 8살인데 벌써 사는 게 이렇게 골치 아프고 고달프다니, 어떻게 80살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살아가게 마련이야. 그리고 그건 네 생각처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야.”


    어린왕자는 앞으로 800년도 더 남은 자신의 수명을 떠올리며 말했다.


    “문제는 내가 태어났어야 할 이유도 살아가야 할 목적도 없다는 거야.” 


    소녀가 말했다. 어린왕자는 소녀가 무척이나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미 실존하고 있는데, 그걸로 빈 틈 없이 꽉 차 있는데,  존재의 이유와 목적까지 갖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넌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란다.”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쓸모도 가치도 필연성도 없으면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라는 거, 그게 너무나 수치스럽고 지긋지긋해.” 


    소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조금만 있으면 익숙해질 거야. 모두들 자신에게 익숙해지니까.”


    “아니, 아니, 더 지독한 게 뭔지 알아? 어찌어찌 악착같이 살아나간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한다는 거야. 결국 내일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거지.” 


    “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린왕자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조금 놀랐다. 


    “엄마는 이 모든 걸 알면서 왜 나를 낳았을까?”


    소녀의 작은 눈이 타오르는 것처럼 빛났다. 어린왕자는 소녀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린왕자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의아했기 때문이다. 별안간 소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작은 발을 쾅쾅 구르며 언성을 높였다.


    “생각해 봐. 아이가 죽으면 왜 부모는 울고불고하는 걸까? 아이가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죽을지 알면서 낳은 거잖아. 죽으라고 낳은 거잖아. 자기가 죽인 거잖아. 그래 놓고 마치 아이가 죽을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뻔뻔하게,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난리를 치다니 어찌 된 일이지? 자기가 죽기 전에만 아이가 죽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거야? 아이가 80살, 90살이 되어서 죽으면 그걸로 다 괜찮다는 거야? 지랄하네. 썅, 아이가 죽었다고 쳐울고 있는 부모들을 보면 존나 역겨워.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이기적인 것들. 가증스러운 잡것들 같으니. 갈보년들. 잡놈 새끼들.”


    소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왕자는 처음 보는 인간의 눈물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감정적 반응이 신경계를 자극하여 진통제 역할을 하는 눈물이 흐르게 된다는 건 번거롭지만 기발한 방식이었다.

 

    “나를 위로해 줘.” 


    소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네 말은 모두 사실인 걸.” 


    어린왕자가 말했다.


    “거짓말이라도 해줘.” 


    소녀가 말했다.


   “난 거짓말을 못해.” 


    어린왕자가 말했다.


    소녀는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한참 후에야 소녀는 눈물을 멈추었다.


    “그래도 난 엄마를 사랑해.” 


    소녀가 말했다.


    “언제나 그렇지.” 


    어린왕자가 말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엄마와 함께 죽고 싶어.” 


    “서두를 건 없어.” 


    “아니, 어차피 시간만 질질 끄는 짓이야. 시간 낭비지. 태어나는 건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죽는 것만큼은 내가 결정하고 싶어. 그것도 나름 멋진 일이 아닐까?”





    “멋진 일은 아니야.” 


     “그래, 나도 알아.” 


     그리고 그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안녕.” 


    소녀가 말했다.


    “안녕.” 


    어린왕자가 말했다.


    소녀는 빨간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건물들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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