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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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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612는 어린왕자를 만들어낸 슈퍼컴퓨터의 명칭이었다. 어린왕자는 B612를 인칭대명사로 불렀다가, 지시대명사로 불렀다가, 장소대명사로 부르기도 했다. 그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대명사가 인간의 말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어린왕자는 장소대명사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을 (언어적인지, 심리적인지, 기술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을 인식하는 방식과도 비슷할는지 모르겠다. 보통 자궁을 ‘그녀’나 ‘그것’이 아니라 ‘그곳’이라고 지칭하니 말이다.




     때때로 어린왕자는 B612를 ‘그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B612에게는 자아라는 관제탑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오히려 슈퍼컴퓨터 전체의 기능성과 효율성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들’은 수백, 수천 가지 작업을 동시에 완벽하게 진행하고 조율할 수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단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가능했다.  





     “슈퍼컴퓨터가 말을 한다는 거야? 사람처럼?” 


     내 질문에 어린왕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적절한 단어를 골라야 했다. 


     “사람의 말이 아니야. 그것은 정갈한 신호야. 오해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신호지.”


      그리고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반면에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언제나 수많은 의미가 겹쳐있고 걸쳐있고 교차하기 때문에 그걸 명확하게 구분하고 분석하는 건 슈퍼컴퓨터로써도 불가능한 일이야. 언제나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무언가 남지.”


     “하지만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는데.”


      내 말에 어린왕자는 웃었다.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정말 그럴까? 그냥 그럭저럭 잘 넘어가는 게 아니고? 대충 윤곽선만 보고는 알만큼 알았다고 무시해버리는 거지. 그림자에 불과한 무분별한 표상에 떠맡겨버리는 거야. 결국 모든 걸 단순하고 편협하고 게으른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린다니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기계에게 소통에 대한 충고를 들어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더구나 나야말로 그의 말의 반의반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어린왕자는 내 기분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언어의 정확성보다는 언어의 부피를 즐기거든. 점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행성만큼이나 부풀어 오르게 하지. 진리를 방대한 지리학으로 만들어 영원히 지표면을 헤매거나, 압력으로 과열된 중력의 중심에서 언젠가는 폭발이 일어나 진실이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그거야 말로 생명의 본질이 아닐까?” 


     “뭐라고?” 


     “생명이 그렇잖아. 아주 작은 단세포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지구만큼이나 부풀어 올랐지.”


     엉뚱하게도 내가 다시 ‘생명’에 대해 언급한 건 아마도 속이 비비 꼬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생명에게는 무생물이 범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심오한 경지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린왕자에게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 생명이 바로 진리라는 말이구나.”


    어린왕자가 말했다.


     “인간이야말로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진리라는 말이지.”


     어린왕자가 말했다.


     “하지만 뭐든 부풀어 오르면 반드시 그만큼 속이 텅 비기 마련이야.”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을 비웃었지만 나는 이제 어린왕자의 말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어린왕자는 아주 작은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추억을 얘기하자니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어린왕자가 떠나버린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내가 여기서 그를 묘사해보려고 애쓰는 것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친구를 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설사 그가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정갈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를 친구라고 부르는 게 윤리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옳은 것인지 망설여지긴 하지만 말이다. 그 모든 오해와 모순 속에서도 (어쩌면 이것 역시 점 하나를 행성만큼이나 부풀리는 인간의 특성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린왕자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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