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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26. 2020

5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는 어린왕자의 연구소나 슈퍼컴퓨터 B612, 그리고 그의 여정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무심결에 하는 얘기를 통해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왜 어린아이인 거지?” 


     어느 날 오후,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을 피해 반쯤 기울어진 주유소 지붕 밑으로 기어들어가면서 내가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도무지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실망하고 있었고, 기분 전환을 위해 이 난처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가벼운 이야기가 필요했다.


     “누구를 말하는 거야?” 


     어린왕자가 구겨진 플라스틱 음료수병의 성분을 분석하다가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너 말이야.” 


     “나?” 


     “왜 어린아이인 거지?” 


     어린왕자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어린아이인 게 아니야. 네가 나를 어린아이로 보는 것뿐이지.”


      “그거야 네가 어린아이로 보이니까.”


     “그럼 내가 하는 얘기들도 모두 어린애가 떠드는 소리처럼 들리겠네?” 


     “뭐, 아무래도 그렇지.”

 

     어린애 얼굴로 웃고, 어린애 목소리로 말하고, 머리 위로 자그마한 손을 흔드는 이 아이를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만약 내가 스무 살 남자의 모습이었다면, 아니면 마흔 살 여자의 모습이었다면, 혹은 예순이 넘은 노인의 모습이었다면, 내가 하는 똑같은 말이라도 다 다르게 들렸을까?”


     “그야 그렇지.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린왕자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인간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만큼이나마 문명을 이룩했는지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이토록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데 말이야. 도대체 이래서야 간단한 대화조차 가능할 리 없잖아.” 

나는 인간을 불량품 취급하는 어린왕자의 태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마다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가차 없이 인간을 폄하하는 어린왕자의 평가를 듣고 있노라면 역시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끈기 때문일 거야.”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건성으로 말했다.  


     “끈기?” 


     어린왕자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어린왕자는 그냥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의지 말이야.” 


     나는 서둘러 정정했다. 그리고는 어쩌면 정정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내심 인간의 의지를 높이 사고 있었고, 모든 동물들 중에서 인간의 의지가 가장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결국 생존도 지배 관계도 모두 의지와 의지의 대결이 아닌가. 누구도 인간이 나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어린왕자가 입을 떼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인간에게 단점이 많은 건 사실이야.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우린 이런 인간이 되고 말았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만큼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건 생존과 번영, 그리고 진보를 위한 굳센 의지를 가지고 전진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인류를 대변해서 한바탕 멋지게 연설을 할 참이었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그런 내 말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생존, 번영, 진보를 위한 의지라고? 세상에. 그 대단한 의지가 인류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똑똑히 봐. 네가 바로 그 증인이잖아.” 





     어린왕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도시의 폐허 한가운데, 기울어진 주유소 지붕 아래 널브러져 있었다. 주유소 지붕이 미처 막아주지 못한 열기 때문에 내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의지란 그저 최초의 세포를 만들어낸 생명의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힘에 불과해. 만족을 모르고 목표도 없어. 나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도, 방해물뿐만 아니라 보호막도,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 닥치는 대로 뚫고 나아가야 직성이 풀리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뜯어먹고 배를 채우면서 살아가는 힘이야. 마치 부숴버리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마치 죽어야 할 자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런 의지란 결국 타락일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야말로 가장 타락했다고 할 수 있겠네.”


     어린왕자는 들고 있던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사거리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다. 먼지 속을 데구르르 구르는 플라스틱 병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나는 땀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걸 막기 위해 계속 눈을 깜빡였다. 이마에서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니까, 왜 어린아이인 거지?” 


     나는 땀을 닦으며 다시 한 번 어린왕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엉뚱한 대꾸를 했다.


     “나는 귀여운 거야?” 


     “어?” 


     “보통 아이들을 귀엽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귀여운 거냐고.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말이야.”


     “뭐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린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들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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