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기 사장님이세요? 이야, 가게가 멋지네요. 특이하게 남자분이 꽃집을 다 하시네. 아, 저는 이번에 옆 가게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에요. 핸드폰 가게요.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김수철이라고 합니다. 사장님은 핸드폰 어디 꺼 쓰세요. 사용한지 몇 년 되셨어요? 2년 넘으셨다구요? 에이, 그럼 이제 완전히 고물이네요. 핸드폰도 요즘은 1년에 한 번씩 바꿔줘야 돼요. 한번 저한테 오세요. 제가 완전 최신형 핸드폰으로 싹 바꿔드릴게요. 당연히 공짜죠. 부담 가지실 거 없어요. 이웃 좋다는 게 뭐겠어요. 앞으로 제가 신세 질 일이 많을 텐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손님들한테 저희 가게 소개도 좀 해 주시구요. 자, 여기 개업 떡 맛있게 드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스물아홉인데요, 연배가 저보다 높으신 것 같으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수철은 넉살 좋게 수다를 늘어놓아 현태의 혼을 쏙 빼놓고는 가게에 놓겠다며 노란 도자기 화분에 담긴 아이비도 하나 사들고 돌아갔다. 현태는 그때만 해도 앞으로 수철이 자신의 가게를 들락거리며 치근덕거리면 어쩌나 골치가 아팠다. 자신도 과묵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너무 허물없이 구는 사람은 달갑지 않았다. 더구나 수철의 태도에 배어 있는 닳고 닳은 장사치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벌써 저렇게 너덜거리는가 싶어서 위화감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자신의 가게에 놀러 온 수철을 무뚝뚝하게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수철은 현태를 잘 따랐다. 형님 형님 하며 제법 스스럼없이 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현태도 점차 수철이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가끔씩 함께 술을 마시러 갈 정도가 되었다.
“자, 형님, 커피 마시고 하세요.”
수철이 커피 향이 물씬 풍기는 종이컵을 현태의 턱 밑에 내밀었다. 현태는 막 다듬은 하얀 백합 한 송이를 물통 속에 꽂아 놓고는 컵을 받아 들었다. 젖어 있는 손에 커피의 따듯한 기운이 전해져서 그는 잠시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수철의 커피는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똑같은 인스턴트 커피라도 물의 비율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기 마련인데 수철의 커피처럼 맛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현태는 이때껏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수철이 타준 커피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가 수철에게 마음을 열게 된 데에는 수철이 타준 커피도 한몫했을 것이다.
“형 얼굴 보니까 어제도 잠을 못 잤나 보네. 계속 그러면 어떻게 해요? 벌써 몇 달 째잖아. 불면증도 오래 가면 큰일이라는데.”
무슨 얘기인가 싶어 멍청하게 수철을 돌아보던 현태는 ‘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머쓱하게 왼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새벽까지 보초를 서느라 거칠어진 현태의 낯빛을 눈치챈 수철이 자꾸 따져 묻는 것이 귀찮아서 불면증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아냐, 아침 일찍 나오느라 면도를 못해서 그래.”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면도하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 무심코 문지른 턱의 뻣뻣한 잔털들이 제법 손바닥을 찔렀다.
“뭘, 척 보니까 어제도 많이 못 잤구만. 안색이 영 안 좋아. 4시간도 못 잤죠? 쯧쯧, 그래서 어떻게 살아. 3년 전에 형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거 알아요? 아, 진짜라니까. 완전히 폭삭 늙었어.”
수철이 반말과 존댓말을 능숙하게 섞어가면서 다정하게 하는 말을 현태는 바보처럼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일요일이라도 좀 쉬어요. 일요일까지 가게를 여니 몸이 견뎌내겠어요?”
“야, 한 달에 4일을 놀면 매출이 얼마나 차이나는 줄 알아? 4일이면 월세가 빠져. 게다가 생화는 하루 묵히면 그만큼 손해란 말이야.”
“어이구. 진짜 재미없게 산다니까.”
“성실하게 사는 거지.”
“자자, 내 말 좀 들어봐요. 형한테 왜 불면증이 생겼을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단 말이야. 그런데 곧바로 딱 결론이 나오두만. 문제는 여자야, 여자. 서른여섯 살 한창 나이의 남자가 여자 없이 잠이 올 리가 없지, 안 그래?”
“그런가?”
현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형, 흘려들으면 안 된다니까. 나도 미영이랑 일주일만 건너뛰어도 몸이 쑤시고 싱숭생숭한데, 애인 없는 형이야 오죽하겠어.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형이 뭐가 부족해요? 젊은 나이에 벌써 어엿한 가게 사장이겠다, 성격 좋겠다, 돈도 좀 모았겠다, 키는 좀 작지만 뭐 얼굴도 무난한 편이고…….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잖아. 그러니까 만날 살맛 안 난다는 얼굴로 시들거리지 말고 자신감을 좀 가져봐요. 아니면 나한테 딱 맡겨 보라니까. 여자 다섯 명 정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올 수 있으니까 하나 골라잡으라구요.”
현태는 수철의 능청에 마지못해 소리 높여 웃었다.
“형, 도대체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언제예요? 지난 3년 동안 여자 친구라고는 쥐뿔도 없었던 건 내가 잘 아는데 말이야.”
현태는 히죽거리던 웃음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그는 조금 불쾌해졌다. 일단은 수철이 그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 최소한 3년간의 일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거슬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철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현태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근 3년 동안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수철이었다. 현태는 그 사실을 수철에게 숨기려고 무던히 애썼고 네가 모르는 그 밖의 일들도 내 인생에는 많다고 은연중에 강조하곤 했지만 수철은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언제냐구요. 4년 전? 5년 전? 에이, 설마 그것 보다 더 오래된 건 아니죠?”
현태가 대답이 없자 정말 궁금해졌는지 수철은 위협적으로 턱을 휘두르며 현태를 다그쳤다. 하지만 솔직히 말했다가는 수철이 난리법석을 떨게 불 보듯 뻔한지라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태는 10년 전에 딱 한번 연애를 해본 뒤로 여자와 사귄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십 대 때까지는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또 심지어 장난 삼아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서른 살이 넘고 나니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점차 숨기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