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사장님.”
“네?”
“저기, 죄송하지만 지나가다 보니까 옮길 게 많으신 것 같은데, 몸도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대신 해드리고 밥 한 끼만 사먹게 만 원만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팔천 원만 주셔도 됩니다. 저기, 제가 화분 상하지 않게 잘 옮겨드릴게요.”
새까만 얼굴의 남자는 말 그대로 굽실거리며 말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미간을 잔뜩 모으고 있어서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왼쪽 앞 이빨 두 개가 없어서 더 그래보였는지도 모른다. 현태는 당황해서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장님, 저, 정 그러시면 오천 원만 주셔도 됩니다. 네?”
키 작은 사내는 더욱 웃으며 - 그러나 동시에 더욱 미간을 모으며 - 말했다.
“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현태는 힘주어 말했지만 선뜻 화분을 옮기러 나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손끝에 경련이 일어나서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마시구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제가 잘 옮겨 드릴게요. 진짜 애기 나르듯이 조심조심 날라드릴 테니깐 딱 오천 원만 주세요.”
키 작은 남자는 부드럽게 그러나 끈질기게 요구했다. 현태는 그만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을 본 남자는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라도 상했는지, 혹은 그래도 선처를 바라는지, 입을 다물고 현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현태는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작고 새까만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더 고개를 숙여 비교적 깨끗한 남자의 흰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운동화는 그 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정말이지 고집 세어 보이는 운동화였다. 사실 현태도 이 남자에게 인간적이고 따듯한 말 몇 마디를 건네주고 싶었다. 선뜻 일을 맡기고는 수고했다고 만 원짜리 한 장을 척 내주고 싶기도 했다. 그편이 서로 이렇게 염치없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보다는 훨씬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이 남자를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불편했다.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동정이야 말로 이 남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형, 뭐하세요?”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현태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수철이 가게 열쇠를 손가락에 끼고 휘휘 돌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전처럼 깨끗이 면도를 하고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멀끔한 모습이었다. 수철은 키 작은 남자와 현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뭐하고 있어요?”
“아, 화분을 옮기고 있었는데, 여기 이 분이 도와줄 테니 오천 원만 달라고 하셔서. 나는 됐다고 했는데…….”
현태는 재빨리 속삭이고는 곤란하다는 눈짓을 해보였다. 어른에게 일러바치는 어린아이 꼴이었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수철은 재빠르게 남자를 훑어보더니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아아, 그럼 여기 오천 원 드릴 테니까 그만 가보세요. 화분은 형하고 제가 옮길게요.”
수철이 지갑에서 천 원짜리 5장을 꺼내자 남자도 현태도 깜짝 놀라 동시에 수철을 쳐다보았다.
“이거 가지고 김밥이라도 사드세요. 여기는 우리 둘이면 충분해요. 남자 셋이 달려들 일은 아니잖아요.”
수철은 말끝마다 사람 좋게 웃었지만 현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았다. 만약 남자가 곧바로 천연덕스럽게 돈을 챙겼다면 모두가 만족했을 것이다. 만약 남자가 곧바로 단호하게 돈을 거절했다면, 역시나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미간을 좁히고 턱을 길게 빼고는 더듬더듬 말꼬리를 끌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도와드리려고 한 건데.”
“아, 됐다니까요. 가 보세요.”
수철의 성마른 어투에 남자는 입술을 짓누르며 눈앞에서 펄럭이는 오천 원을 노려보았다. 반들반들한 자갈조각 같은 눈빛이었다. 현태는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단지 노동을 해주고 약간의 대가를 얻고 싶었을 뿐이다, 동정을 바라긴 했지만 적선을 구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2개가 비어있는 노란 이빨을 드러내며 한 번 미간을 씰룩이더니 수철의 손에서 돈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넣고서 잰걸음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참 나,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돈만 낚아채고는 휙 가버리네. 볼 장 다 봤다 이건가?”
수철은 투덜거렸지만 현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남자가 가고나니 살 것 같았다.
“웬일이야? 일찍 출근했네?”
“아, 그동안 비워뒀더니 가게가 엉망이라, 청소라도 좀 하려구요.”
“뭐, 그 일은 잘 됐나봐?”
현태는 무심한 척 말을 꺼냈다.
“네. 다 처리했어요.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거죠.”
“그래서, 얼마나 넣었어?”
“그냥, 뭐, 네, 닥치는 대로 끌어다 넣었어요. 후우, 진땀 좀 뺐어요.”
“그럼 이제 가게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하긴 앞으로 돈다발이 쏟아져 들어올 텐데 이까짓 가게야 곧 집어 치우겠지?”
비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도 막상 말해놓고 보니 한껏 비꼰 것 같았지만, 수철은 가지런히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곧 정리해야죠. 그래도 시간이 좀 있으니까 장사는 계속 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려구요.”
수철은 다정하게 현태의 등을 툭툭 쳤다. 현태는 위풍당당한 수철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문득 아까 초록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키 작은 남자를 떠올렸다. 근심과 한탄,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쭈그러들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깊은 고민이 새겨진 얼굴. 현태는 자신의 얼굴까지 쭈그러드는 것 같아 눈을 깜박였다.
“자, 그럼 화분을 날라볼까요?”
“그래, 고맙다. 사실 몸이 안 좋아서 힘들던 참이었거든.”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면서 현태는 그만 비굴한 기분이 되었다. 차라리 키 작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남자에게 일을 부탁하고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했다면 그 남자도, 자신도, 이보다는 떳떳했을 것이다.
화분을 다 옮기는 데에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수철은 현태가 원하는 곳에 고분고분 화분을 옮겨주고는 커피까지 끓여 내왔다.
“저기, 근데 형. 저번에는 내가 미안했어요.”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현태는 멍하니 수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러니까, 있잖아요. 저번에 내가 투자 얘기했을 때요. 마음이 급해서 형한테 좀 버릇없이 군 것 같아요. 나는 그냥 좋은 뜻으로 얘기한 건데, 내가 좀 그랬지? 정신이 없어서 이것저것 생각하지를 못했어요. 하여간 미안해요, 형.”
하지만 수철은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태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처럼 관대한 표정이었다. 수철은 입만 웃는 것 같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형도 꼭 잊지 않고 챙길게요. 내가 형을 모른 척 할리 없잖아요. 기회가 또 생기면 그때는 제일 먼저 형한테 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구요, 네?”
현태는 불시에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키 작은 남자의 자갈조각 같던 새까만 눈빛이 그의 눈가에도 떠올랐다. 이제 아무리 그가 수철을 진심으로 대한다 해도 수철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굴이나 아첨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현태 스스로도 자신이 어느 쪽인지 헷갈릴 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