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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37)

by 곡도




그 날부터 수철의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예전으로 돌아갔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하는 멀끔한 양복차림의 세일즈맨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철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고 정중해 졌으며 넉넉하게 웃었다. 불평불만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았다. 수다를 떨기위해 아침마다 현태의 가게를 찾는 일도 그만 두었다. 오랜만에 함께 찾아간 ‘사장님과 비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철은 곰곰이 웃는 낯으로 맥주 몇 잔을 비우고는 두말없이 술값을 계산했다. 그는 더 이상 공짜 술이나 얻어먹고, 황당한 음모론을 주워섬기고,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언성을 높이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엄청난 행운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그 행운에 걸맞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씹지도 않고 통채로 삼킨 행운을, 자기 위장보다 훨씬 더 큰 그 단단한 행운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혼수상태에 가까운 휴면이 필요할 테지. 하지만 현태는 태연자약해 보이는 수철의 서늘한 이마와 어깨에서 내장을 온통 뒤흔들고 있는 거친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되면 수철은 분명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끊임없이 히죽거릴 것이다.

술 마시던 내내 실눈을 뜨고 수철을 살피던 오마담은 후에 호텔방에서 현태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아니, 수철씨는 한동안 안보이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봐? 사람이 확 변했데. 뭐야? 로또라도 맞았나? 아니면 부자 부모가 죽기라도 한 거야? 팁이라면서 3만원이나 더 주고 갔다니까?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글쎄요. 요새 장사가 잘 되나 보죠.”

현태는 어영부영 둘러댔다. 비밀을 지키기로 한 수철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별로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현태는 새삼 예전의 - 별로 오래 전도 아닌 - 수철을 떠올려보았다. 고만고만해서 서로 거리낄 게 없었던 수철 말이다. 하루 종일 미지근한 꽃향기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현태는 자신이 무색무취의 연기가 되어 옷 밖으로, 창문 밖으로, 골목 밖으로 새어나가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수철이 불쑥 찾아와 싱거운 우스갯소리라도 해주면 그 납작하고 소소한 무게들에 안심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 현태의 마음속에는 수철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이 젖은 모래덩어리처럼 가득했다.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을 곁에서 내내 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다. 차라리 수철이 수십억이든 수백억이든 빨리 돈을 챙겨서 자신이 모르는 먼 곳으로 영영 떠나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섹스를 끝낸 현태와 오마담은 나란히 침대 위에 늘어졌다. 그녀를 두 번이나 안은 탓에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사실 그건 좀 무리였기 때문에 두 번째는 시늉에 그치고 말았지만. 현태는 이불로 목덜미의 땀을 닦아 내고는 팔베개를 하고 나른한 만족감에 빠져들었다. 창밖에서 반사된 불빛으로 아른거리는 때 묻은 천정을 바라보자니 세상이고 수철이고 다 상관없는 기분이었다.

“가게 나갈 시간 아니에요?”

현태가 묻자 엎드린 채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던 마담이 찌뿌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이따 나가지 뭐. 요새 손님도 별로 없고.”

그녀의 하얀 등에는 기미인지 주근깨인지 모를 반점 자국들이 잔뜩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문질렀다.

“손님 없어요?”

“원래 5월이 그래. 가정의 달이잖아. 5월 한 달만이라도 마누라 옆에 붙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나보지.”

마담은 킥킥 거렸고 현태도 코웃음 쳤다. 현태가 막 그에 대해 비속한 농담을 하려는데 벗어놓은 바지춤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팔을 뻗어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액정 화면을 보자마자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더니 마담에게서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예, 아버지.”

“현태냐?”

“네.”

“집이야?”

“네.”

“그냥 전화했다. 전화한지도 오래되고 해서.”

“네. 잘 계셨어요?”

“그래, 뭐, 나야 잘 있었지. 너도 별 일 없지?”

“네.”

“그래, 사업은 잘 되니?”

“그렇죠, 뭐.”

“엄마하고, 현지도 잘 있고?”

“네. 잘 계세요. 현지도요.”

“그래, 그래, 알았다. 그럼 들어가라. 다음에 또 전화 하자.”

“네. 쉬세요.”

그는 핸드폰을 다시 바지춤에 쑤셔넣고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야?”

마담은 여전히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네.”

“아버지가 어디 멀리 계신가 봐?”

“네?”

“아니, 저번에 어머니가 가양동 사신다고 했잖아. 가끔 주말에 찾아봬야 한다고.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하고 같이 안 계신 것 같아서.”

현태는 졸고 있는 줄 알았던 마담이 남의 전화를 꼼꼼하게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예, 지금 지방에 계세요.”

“그래? 아, 저기, 지금 바로 나가지 않을 거지? 나 20분만 있다가 깨워줄래?”

“네, 그럴게요.”

잠시 후 마담은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현태는 샤워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욕실로 들어가려는 데 바닥에 던져놓았던 바지춤에서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이번에도 병규였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예, 아버지.”

“그래, 나다. 내가 아까 얘기한다는 게 깜빡했는데, 저기 딴 게 아니라, 내가 다음 달 쯤 서울에 올라갈 것 같은데.”

“네?”

“그 때 좀 만났으면 해서.”

“예에, 알겠어요. 그럼 올라올 때 연락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때 보자. 아, 그리고 저기, 나 지금 천안에 있다.”

“아, 네에. 예,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현태는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병규가 본인의 거주지를 언급했는지, 왜 갑자기 만나고 싶어 하는지 의심스럽고 신경이 쓰였다. 4년 만에 아들이 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걸까? 당치 않은 일이었다. 최소한 현태가 아는 병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병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그게 뭘까 꼽아보려는데 별안간 극심한 두통이 후려치듯 현태의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양쪽에서 엄청난 힘으로 골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현태는 비틀거리며 옆에 있는 변기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 안으려 했지만 손이 떨려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최대한 둥글게 구부리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낀 채 턱이 얼얼해지도록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팬티만 입은 마담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무릎 위에는 그가 흘린 침이 흥건했다.

“뭐야. 20분만 있다가 깨워달라고 했잖아?”

하지만 새하얗게 일그러진 현태의 얼굴을 본 마담은 깜짝 놀라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디 아파? 아이구, 손 떠는 것 좀 봐. 왜 그래?”

오마담은 뜨거운 물을 수건에 적셔 땀과 침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마에 닿는 따듯한 온기에 그는 겨우 미간을 펴고 마담을 바라보았다. 자다가 일어나 온통 화장이 들뜬 그녀의 부스스한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고 허리를 굽히면서 늘어진 젖가슴도 홀쭉하니 주름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담에게 주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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