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말이 되자 꽃집의 성수기도 끝나가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이제 곧 여름이 될 것이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진하게 타서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벽을 타고 어른거리는 햇빛을 이렇게 여유롭게 바라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반짝이는 먼지들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 위로 아지랑이처럼 날아올랐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뜨끈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두통도 없었고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며칠 째 그를 괴롭혔던 어깨 통증도 한결 나아졌다. 그는 반쯤 남은 커피를 탁자위에 내려놓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금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사장님. 사장님.”
현태는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영이 서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뻔히 쳐다보다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주무시는데.”
선영은 짐짓 사과하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제가 깜빡 잠이 들었나보네요.”
그는 손바닥으로 황급히 얼굴을 매만졌다. 창피한 나머지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선영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봐요. 꼭 가게 안에서 코끼리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세요.”
“코끼리요?”
“모르세요? 어제 뉴스에 나왔잖아요. 동물원에서 탈출한 코끼리 세 마리가 식당으로 몰려 들어가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데요.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요.”
“그래요?”
“식당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데요. 생각만 해도 우습지 않아요? 해장국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집채만 한 코끼리 얼굴이 떡 하니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람들 표정이 어땠겠어요.”
그녀는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 내어 웃었다. 현태도 따라 웃었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 네. 한잔 주시겠어요?”
그녀는 흔쾌히 응하며 현태가 권하는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재빨리 커피 두 잔을 끓여왔다.
“실은 저도 그런 경험이 있거든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모아 받으면서 그녀는 활기차게 말했다.
“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코끼리를 보는 것 같은 일이요.”
“어떻게요?”
“그러니까 몇 년 전에 택시를 타고 강변북로를 지나가고 있었는데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새까만 게 제 옆에서 달리고 있는 거예요. 뭐였는지 아세요?”
“뭐였는데요?”
“말이요. 검은 말.”
“말이요? 살아있는 말이요?”
“네. 얼마나 놀랐다구요. 아니, 놀란 건 그 다음이고, 처음에는 그냥 머리가 정지되어 버리더라구요. 생각해 보세요. 도시 한복판의 아스팔트 찻길 위에서 다른 차들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검은 말을요. 어찌나 기이하고 신기하던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거예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러니까 내 꿈이 아니라, 꼭 다른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 처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토평 승마장에서 탈출한 경마용 말이었대요. 나중에 뉴스에 나오더라구요. 트럭에서 내리는 중에 사육사를 내동댕이치고 도망쳤데요. 나중에 말은 무사히 잡혔구요. 덕분에 저야 진귀한 구경을 한거죠.”
그녀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긴 갈기를 휘날리며 강변북로를 질주하는 검은 말과 선영의 웃음, 창문으로 비추는 햇빛이 뒤범벅이 되어 현태는 잠시 넋을 놓았다.
“사장님은 살면서 그런 일 없으셨어요?”
“저요? 글쎄요. 저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음, 그냥 별건 아니고, 예전에 가게 문을 열어 놨더니 새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은 있는데…….”
“그래요? 이 안으로요?”
그녀는 당장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새인데요?”
“모르겠어요. 참새나 비둘기는 아니고, 가슴에 주황색 깃털이 난 작은 새였는데…….”
“그래서요?”
“그냥 뭐, 여기 나무 화분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울더라구요.”
“어머나, 여기가 정원인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다시 문밖으로 날아갔어요.”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새가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현태가 빗자루를 들고 쫒아내려 하자 놀란 나머지 쏜살같이 쇼윈도 유리창으로 돌진해 목을 부러뜨렸던 것이다.
“아, 귀엽네요.”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이럴 때 그녀를 소리 내어 웃게 해줄 재밌는 이야기가 자신에게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현태는 낙담했다. 선영은 빈 종이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어요. 이제 그만 가볼게요.”
그는 냉장고에 따로 챙겨 놓았던 꽃다발 더미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꽃다발 값을 치르며 수줍게 말했다.
“그리구요, 저 수강생이 한 명 더 늘었어요.”
“와, 그래요? 축하합니다. 그러다가 금세 학원이라도 차리시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런 건 아니에요. 수강료도 싸고 여자들끼리 말벗도 되니까 오는 거죠. 그래도 수강생이 늘어나니까 기분은 좋더라구요. 다음 주 부터는 한 사람치 만큼 더 챙겨 주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어린 아기라도 달래듯 두 팔로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쳐 들고 가게를 나갔다. 문이 닫히자 가게 안은 알싸하고 개운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는 탁자 위를 치우려던 손을 멈추고 그녀가 내려놓고 간 하얀색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종이컵 테두리에는 갈색 커피 얼룩과 희미한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평온했던 하루는 저녁이 되기 전에 깡그리 망쳐지고 말았다. 전조는 늦은 오후, 꽃바구니를 장식할 다홍색 리본에 고객의 전언을 옮겨 쓰면서 나타났다. '존경하는 최갑성 선생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자 강혜영 드림'이라는 길지 않은 한 줄의 문장이었다. 글씨만큼은 제법 달필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터라 현태는 거리낌 없이 붓펜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펜을 고쳐 잡아도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 자 한 자 쓸수록 글씨가 점점 작아지더니 마지막 '림'자는 첫 '존'자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네 번이나 리본을 갈아치우고 한 글자마다 1분씩 쉬어가며 매달린 끝에야 간신히 글쓰기를 마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어리둥절했지만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는데, 그로부터 2시간 정도 지났을 때쯤 그의 두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통은 없었지만 손이 떨리는 정도로만 보면 모텔 때보다 더 심했다. 두 손을 깍지 껴서 힘껏 멈춰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중요한 부속이 빠져버린 것처럼 저절로 덜거덕거리는 자신의 두 팔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이 오싹하고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년의 남자 손님 한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현태는 기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손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손님은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금전수 화분 하나를 고르고는 선물용으로 포장해 달라고 했다. 현태는 화분을 손이 아닌 두 팔로 껴안다시피 들고 작업대로 가져와 포장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떨리는 손으로는 쉽지가 않아서 한참이나 쩔쩔매고 있었다. 결국 남자 손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뇨, 아닙니다. 제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몸살인가 봐요.”
하지만 남자 손님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자꾸만 현태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도대체 몸 어디가 안 좋아야 저렇게까지 손을 떠는 걸까 의아했던 것이다. 술이나 마약처럼 한층 더 고약한 상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현태는 창피하고 또 화가 나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