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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윤 Oct 14. 2023

너에게로 가는 길

항공기 승무원의 엄마 일기


D+82


아기 냄새 풀풀 풍기면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정말 신기한 감정이 든다.

어느 날은 이 아이를 위해서 모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고 꽃밭만이 가득할 것 같으면서도


또 어느 날은 내가 이 아이의 전부 인 게 버겁고 무서워서 가라앉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나 보다.

막연하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무거운 책임감들이 양발에 칭칭 동여매인채로 가라앉는다.

양육의 무거움을 생각하지 않고 시작을 한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어두워진다.


32년 동안 내가 제일 우선으로 살았던 내가 , 네가 우선인 인생을 잘 해낼 수 있을지 , 줏대도 없고 게으르고 잠도 많은 내가 , 부지런하게 너를 자존감 있는 아이로 키워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들까지 다양한 생각의 무게들로 수면 깊이 가라앉는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한 발자국도 못 디딜 거 같은데 이 적막함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고새 깨서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 너를 보면서 ,

한 줌의 빛이 보인다.


그래 , 그 빛을 따라서 천천히 정성 들여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그 끝에는 네가 있겠지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정성스레 발디뎌서 나를 만나러 왔겠지 


너를 향해가는 서툴고 , 많은 시행착오가 있는 발걸음들이겠지만 모든 마음을 쏟아서 너에게로 걸어갈게. 지금처럼 기다려줘 아가







아기가 태어난 지 82일째 썼던 글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느낀 우울감은 가늠도 안 되는 무겁고 커다란 책임감에 잡아먹혔던 것 같다. 나는 책임 자체를 굉장히 어려워했던 것 같다. 


나로 인해 파생되는 어떠한 결과들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질 준비가 안되어있는 미성숙한 사람 그 자체 그래서 언제나 타인에게 결정을 미루고 이끌려가는 게 마음 편했다. 그래야 뭔가에 실패해도 핑계를 댈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살았던 사람이 앞으로 평생을 책임져야 할 것과 마주하니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아기가 30개월이 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내가 짓는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이 작은아이가 어쩔 땐 무섭기도 하다.내가 내뱉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흡수하여 자그마한 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는 게 참 신기하다. 


아이에게 좀 더 예쁘고 행복한 것들을 주고 싶고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다정한 것들만 내어주고 싶다.  이따금씩 아이가 나에게 주는 순간들은 ,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열심히 잘 살고 싶다. 

바르게, 아이한테 한 낯 부끄럽지 않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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