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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윤 Oct 15. 2023

 초라한 하루

항공기 승무원의 엄마 일기 

D+140


기분이 안 좋다.
기분이 안 좋다는 감정이 반가울 지경만큼 나를 살펴볼 겨를이 없다.
이제 아이의 하루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해졌고, 그 하루가 매일매일 반복에 반복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건강하고 무탈한 정말 정말 정 - 말 감사한 하루들이지만, 무료하기 짝이 없다.

'감사함이 무뎌진 자리에는 무료함과 권태로움이 여기저기 묻어져 있다. '

언제나 피로한 건 이제 익숙해졌고 , 언제나 늘어진 티셔츠에 꾸질 거리는 내 모습은 이제 그러려니 한다.

휴대전화 저 너머 속 사람들이 어느 정도 꾸며져 있는 상황, 논픽션인 건 당연히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부럽다.
큰 게 부러운 게 아니다.
그냥 혼자 나가서 따분하게 킬링 타임 하는 저 시간들이 부럽다.

부모의 희생은 당연한 거라 하지만, 이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런 무료하고 권태로운 시간들을 희생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무언가의 이벤트가 그립다.
어려운 시댁 어른들의 방문마저도 반갑다.

분윳값 버느라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남편의 시간마저 부럽다.

그래도 적어도 당신은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가지 않느냐 , 나는 똥독 올라서 얼굴이 갈색이다. 밥은 식어빠진 쌀알을 억지로 욱여넣으며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는 나의 아점저를 생각하며 내가 참 불쌍하다 느껴진다.  

이에 밖에서 미세먼지를 콧구멍에 가득 머금고 들어온 남편에게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나니 , 역시나 기분이 안 좋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의 모습은 어디 갔으며,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다채로운 엄마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이건 아이의 문제도, 남편의 문제도 아닌 나의 문제다.

이럴 때 들어오는 남편의 위로가 참 얄밉다.
지금 이 시기만이 아이랑 많이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원론적인 그의 위로가 날 더 초라하게 만든다.

누가 모르나 , 볼멘소리로 또 한 번 푸닥거리를 한다.

이렇게 초라한 시간들이 모여 희생이라는 거창하고 대단한 단어가 되는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루에도 수십 번 되게 뻔하고 반전 없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후에 진짜 선택을 해야 할 그 복직 시기 즈음에 다시 마음을 꺼낼 예정이지만, 아직은 멀리 보이는 갈림길을 뱁새눈을 하고 지긋이 바라보면서 의미 없는 걱정과 선택 길에 혼자 상상하며 발 동동 거리며 서 있다.

엄마인 나의 모습과 , 온전한 나 자신의 내 모습을 저울질하며 앞으로의 인생에 어떤 모습에 1g을 더 얹을까 고심에 고심 중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당장 먼지가 퀴퀴하게 쌓여있는 유니폼을 탈탈 털어 입고 한 손엔 '따뜻한' 커피, 목에는 승무원 등록증을 멋들어지게 걸쳐 메고 조용하고 일정한 엔진 소리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

그래 , 나도 이렇게 반짝거렸고 바빴고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때가 있었지. 하며 이내 마음을 위로한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과연 이어갈 수 있을까 ,
아니 이어가는 게 맞는 것인가 , 에 대한 고민은 하루에도 수십 번 수천번씩 마음이 바뀐다.

사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갖기 전에 이미 결정한 것들이 있기에 그 신념은 그 누군가라도 지켜야 한다.

그게 내가 됐든, 그이가 됐든 아이의 옆엔 일정하고 한결같이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함을 손가락 발가락 콧구멍 귓구멍 다 걸고 약속했기에 어떤 모습에 1g을 얹는 게 더 어렵다.

네이버 클라우드에 가득 담겨있는 지난날의 나의 비행일지를 살펴보다 이내 다시 오늘로 돌아와 남겨놓은 약 100장의 아이 사진을 살펴보며 또 헤죽거리고 웃는 내 모습이란.

지금의 나의 모습, 아니 엄마들의 모습들이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무채색이고 단조롭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들이 초라함으로 빛바래 가지 않기를 바란다.
수묵화도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기에.

우리의 색채가 아이에게 번져 그 무엇보다 너만은 반짝거리고 무지개처럼 아릅답기를 ,

짜샤 엄마들도 화장하고 치마 입고 구두 신으면 다 죽어 인마
누구 한 명 안 죽이려고 우리 엄마들이 참는다.

그래도 적어도 아이가 나를 바라볼 땐 무채색의 얼굴을 들키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오늘 밤이다.

내일 아침은 2ne1 노래를 들어야겠다.
아침부터 아이에게 빨간색을 보여줘야지

* 그만 좀 오고 싶다고 불어 터진 발을 이끌고 지긋지긋하게 갔던 괌 _ 선셋 사진을 멍하게 한참을 쳐다볼 날이 오다니 ,





아기 생후 140일에 썼던 엄마 일기 


지금 되돌아보면 참으로 무료하기 짝이 없는 감사한 하루들을 반복했다. 

비행을 하면서, 아이와의 심심한 그 하루가 그리워질 줄이야 그때는 전혀 몰랐겠지 

먼 타지에 나와서, 멍하게 한참을 바라본 그 괌 선셋 앞에서 다시 아이의 일상을 그리워할 줄이야 


결국 나는 복직을 하고 어찌 저찌 하루하루 살아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맞는 걸까 언제까지 해야 될까를 생각하며 이착륙을 반복하며 이도저도 아닌 마음을 케리어마냥 질질 끌고 살고 있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은 둥둥 떠있는 이 하루들이 언제쯤 딛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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