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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17. 2021

푸른 잔디밭은 그냥 푸르기만 하다.

(잡초를 뽑는 아침)

돌아서면 보인다는 잡초,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아침나절 선선한 바람이 분다. 새벽 앞산에 뿌연 안개가 드리웠으니 오늘도 만만치 않은 더위가 오리라는 생각이다. 아직은 낮게 드리운 구름 덕에 더위를 피할 수 있다. 복장을 갖추고 잔디밭으로 나섰다. 잔디밭에 잡초를 뽑기 위해서이다. 아내도 따라나선다. 우군이 생겼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장갑을 끼고 잔디밭에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한다. 언제나 바라보는 아름다운 잔디밭, 잡초와의 한판 승부이다. 보기와는 전혀 다른 잔디밭이다.


잔디밭, 같은 잔디밭이지만 바라봄에 따라 전혀 다르다. 우선은, 멀리 바라보는 잔디밭과 앉아 보는 잔디밭이 다르다. 멀리서 바라보는 잔디밭은 푸르름에 신선하다. 푸르름이 편안함을 주고 마음마저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잔잔하게 꾸며진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시원한 잠실 야구경기장을 찾았다. 상큼함이 가득한 잔디밭이다. 전원주택 하면 떠오르는 파란 잔디밭이다. 연초록에 작은 이슬이 앉은 아름다운 곳이다. 햇살이 찾아오면 더없이 아름다운 푸르름이다. 

잠실 야구장 잔디

잔디밭에 앉았다. 잔디밭에 앉아 바라보는 잔디밭은 다르다. 푸르기만 하던 잔디밭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잔디밭엔 자디잔 잡초들이 속속들이 자라고 있다. 곳곳에 작은 잡초가 섞여 살고 있는 것이다. 잔디밭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영역을 넓혀 나가는 잡초들이 대단하다. 잡초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복잡해지는 잔디밭이다. 더 커지기 전에 잡초를 뽑아야 하는 일거리가 있는 잔디밭이다. 부지런히 손놀림을 해야 푸름을 맛볼 수 있는 잔디밭이다. 아내와 함께 서둘러야 하는 그런 잔디밭이다.


남이 바라보는 잔디밭은 또 다르다. 집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말한다. 어떻게 잔디밭을 그렇게 잘 가꾸어 놓았느냐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 잔디밭이 아름답다 한다. 푸르른 잔디밭을 보니 마음까지 편해진단다. 푸른 잔디밭이 좋아서 시골에서 살고 싶단다. 푸르름이 주는 편안함에 시골살이를 하고 싶단다. 멀리서 바라보는 잔디밭이 아름다운 것이다. 푸르름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인내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봄만 있을 뿐이다. 그냥 푸르기만 한 푸름이다.


이웃은 차라리 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으라고 한다. 손을 내저으며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고 만다. 지금 있는 작은 밭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이다. 오늘은 힘에 겨운 탓에 차라리 밭을 만들어볼까도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자잘한 풀들이 하룻밤을 자고 나면 커져있다. 뽑아내고 돌아섰다 다시 보면 풀이 보인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며 다닌다. 잡초를 보면 걸어갈 수 없어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보이는 잡초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눈으로도 뚜렷하게 보이는 잡초를 그냥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밤에 만난 잔디밭

언제부턴가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잡초와 같이 사는 수밖에 없다는 비겁한 타협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임전태세였다. 언젠가는 웬수(?)를 갚아 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살아보니 그런 생각으론 감당하기에 너무 힘에 겹다. 잡초를 뽑아보기도 하고 소금을 뿌려보기도 했다. 아내와 아침, 저녁으로 잔디밭을 서성인다. 시도 때도 없이 서성인다. 잔디밭에 나갔다가 그냥 오는 경우가 없다. 시작하면 적어도 한 시간은 있어야 한다. 이 시간을 전쟁으로 생각하면 같이 살 수가 없다. 잔디와 동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잔디밭에 자리 잡은 잡초를 뽑는다. 세월을 탓하지 않고 잡초를 탓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서늘함을 맛보며, 어느 날은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뽑는다. 잡초가 없는 잔디밭이 있을 수 없기에 동거하는 수밖에 없다. 동거하면서 차츰차츰 잡초를 뽑아 푸른 잔디밭을 만들기로 했다. 노력과 인내가 없으면 푸른 잔디밭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서 바라보는 파란 잔디밭, 남이 바라보는 파란 잔디밭은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노력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푸른 잔디밭이다. 오늘도 친구 삼아 서서히 거닐며 잡초를 뽑아야 푸르른 잔디밭을 만들 수 있다.


수채화를 그린다. 소소한 돌과 풀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작은 풀에도 신경을 쓰고, 조그마한 돌에도 정성을 다해 색을 칠한다. 정성을 쏟아 수채화가 완성되었다. 정성을 다한 수채화는 한 발짝 물러나서 봐야 한다. 그래야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작은 돌에 집착하면 그림을 감상할 수가 없다. 오늘도 잔디밭에서 풀을 뽑는다. 정성을 다해 풀을 뽑는다. 푸르른 잔디밭이 말끔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보는 푸른 잔디밭이 뿌듯함을 안겨준다. 푸르름에 고단함이 얹혔고, 후련함도 섞여 있는 잔디밭이다. 수채화를 바라보듯 멀찍이서 바라보는 그 잔디밭엔 후련한 푸르름이 있다. 바라보는 잔디밭은 그냥 푸름만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쉬운 일이 하나라도 있던가? 쉬운 일이 있으면 하나만이라도 알려달라 했다. 친구가 오히려 나보고 알려달란다. 푸르른 잔디밭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수채화가 저절로 얻을 수 있겠는가? 꾸준한 인내와 노력이 없는 풍요한 삶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잡초가 없는 잔디밭이 있다면 어떨까? 잡초 하나 없는 잔디밭은 너무 잔인한 잔디밭이다. 삶의 의미가 찾아 들 수없는 처절한 곳이다. 삶의 재미가 없는 잔디밭이고, 눈물도 없는 메마른 잔디밭이다. 


바라만 보는 잔디밭과 고단함이 담긴 잔디밭은 맛이 다르다. 몇 날을 물감과 씨름하며 살았다. 죽었던 풀이 살아나고, 무심한 돌이 숨을 쉰다. 파도가 바위를 넘어 쏟아질 듯 으르렁댄다. 수채화가 완성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맛볼 수 있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잔디밭을 서성인다. 뜰 건너 도랑에선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두어 시간을 서성이며 잡초를 뽑는다. 고단함이 배어있어 나의 잔디밭이 더 아름다운 이유이다. 고단한 노력과 인내가 숨어 있는 삶이 훨씬 더 짜릿하다. 고단한 삶 속에서 서성이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궁금함을 풀기 위해 오늘도 잔디밭을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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