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통념이 주도하는 사회

뫼르소를 위한 변명 또는 힐책

by writernoh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사형수가 되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될 운명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며 차라리 자기 생의 마지막이 되는 날, 사형 집도에 많은 손님이 오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정의의 순리를 거치도록 바라는데 그것은 그의 최후 통찰이었다.



뫼르소에 대해 결정 내리기 어려운 몇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가 그는 너무 빨리 기회를 체념해 버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존재의 의미를 착각해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를 주지 않고 훅 내려놓았다는 것. 세 번째는 그의 모든 행동이 비겁한 도피주의의 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단지 저항할 수 없는 사회의 벽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일개 힘없는 존재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까뮈의 문필을 더 이해할 수 있거나 당시 사회적 관점과 현재에 이르러 바뀌어버린 가치를 통용할 수 있다면 이 글은 계속 수정되리라.



삶은 가끔 투명하지 않게 다가온다. 황당한 사건의 발생은 운이 없거나 아직 덜 성숙해서라 치부해 버리고 그날그날을 산다. 오히려 뫼르소처럼 냉정하게 판단하는 쪽이 더 투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든 그렇지 않은 삶을 살든 뫼르소가 겪는 부조리는 누구에게나 유령처럼 붙어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뫼르소의 삶이 말하는 부조리 정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글이다.



첫째가 그는 너무 빨리 기회를 체념해 버렸다는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이 어느 날 사형수가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던 주말 휴가를 갔을 뿐이다. 운명의 고리는 같이 간 레옹에게 있었고 거기에 휘말려 사고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를 믿고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좀 더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사회의 통념으로만 자신의 의뢰인을 보았기에 진정한 뫼르소의 내면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자기 변론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변호사의 제재를 믿고 침묵했다. 사형 언도가 내려졌을 때 더 이상 항소하지 않는다. 이미 살아야 하는 것이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그의 철학은 삶에서의 기회를 모두 포기한 상태이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내려놓은 것인지 다시 짊어진 것인지 헷갈리는 부분이다. 거시적으로는 순리를 받아들이며 신들의 부조리에 반항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것이라 볼 수 있으나, 결국 죽음이 영원한 승리라고 보기에는 뫼르소의 죽을 이유가 당황스럽다.

우발적이라도 총을 쏘았으니 단죄는 되어야겠으나 살해 의도가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 사형 언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대가 지닌 룰을 고분고분 따르는 소크라테스처럼 철학한 것인가. 적어도 그의 정황은 죽을 이유를 알기 위해 저항해야 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아랍인을 죽이고 싶었다고 하는 내면의 소리라도 들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뜨거운 햇볕이 주는 살기였을까. 그래서 사형을 인정한 것이라면 당연해서 부조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을 바라보지 않는 사회의 통념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듯했다. 그래서 부조리였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설득의 지겨움이 그를 차라리 죽게 한 것이라 하는 게 부조리였다면 더 설득적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존재의 의미를 착각해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를 주지 않고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인간 자체에 연연하지 않는 이상적인 삶의 지향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사형판결받은 참작 사유 중 하나, 매정하게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싫어했다는 사유가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문 절차에 따른 원장 접견 과정에서 이미 마지막 인사의 타이밍을 빼앗긴 것이다. 그래도 다시 보겠다고 부득불 우길 이유를 못 찾는 것은 몇 년 전에 헤어진 것이나 지금 헤어지는 것이나 어차피 헤어졌다는 맥락에서 자체 동의를 해버린 것, 하지만 그간 어머니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과 살았을 때와 죽을 때의 이별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잘못이다. 결국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 뫼르소 개인의 부조리가 되었다. 이 부모에 대한 애정부족이 재판에서 지탄받아야 할 패륜으로 낙인 될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뫼르소는 이미 어머니와의 사회적 애착관계는 사라지고 자기 앞의 생에 충실한 인물이었으니 어머니와 함께 지낸 노인들, 그리고 사회 입장에서는 좀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삶을 사회라는 눈빛은 ‘서운하다’를 넘어 ‘이상하다.’로 바라본다.

뫼르소는 낯선 이들 앞이기에 예의를 차려야 흠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할 만큼 으레 그래야 한다는 통념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타인들을 의식하지 않는 자아를 가졌다. 그것이 타인에게 터부시 되든 사랑스러워 보이든 이미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닌 자아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무례하고 이상해 보일지언정, 뫼르소는 타인들 앞에서 사회화되기 위해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것 까지 의도하여 나사를 박은 관 뚜껑을 열고 꼭 어머니를 봐야 할 것인가. 물론 일상의 사람들은 뵐 수 있다면 부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픈 게 사실이지만 뫼르소는 거절했다. 다만 그 방문 절차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 세상 마지막 인사를 했을 터이다. 이것을 법정에서 구구절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원장부터 만나야 한다는 절차의 개입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고 사건 후에 필요한 것을 찾던 검사의 단편적인 이해로 운명의 단서로 활용된 것이 명백한 부조리였다. 그러나 세상의 통념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살해를 했고 어머니의 죽음도 슬퍼하지 않는 부도덕자인 게 더 중요했다. 히치콕의 사이코는 이런 대중을 잘 이해했기에 마지막 장면에 연쇄 살인마가 ‘나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가련한 이야.’라는 코스프레를 취하게 한다. 누가 더 사이코인가.


세 번째는 그의 모든 행동이 마침, 비겁한 도피주의라는 것이다. 부조리에 저항한다면, 사실은 이렇다 하고 스스로 증언해야 했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카뮈는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았다. 뫼르소는 자신의 진실성을 위해 더욱 “뜨거운 햇살이 머리를 아프게 해서.”라고만 증언하게 한다. 그 안에 담긴 상대의 칼날에 섞인 증오와 정당방어라는 소생의 기회를 갖고 있으나, 배심원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은 양로원 노인들의 무겁게 내리누르는 사회적 통념의 절차를 따라 울고 슬퍼하는 방식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견디어 낸 두통이었고, 해변에서 싸움의 불편한 감정을 식히기 위해 서늘한 바위틈을 찾았으나 거기에 상대방 아랍인이 먼저 와서 그늘을 취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상대가 꺼낸 돌발적인 칼날이 햇살에 반사되어, 번뜩이던 빛이 뫼르소의 신경을 건드려 방아쇠를 당기게 했음을 이해시켜야 했으나, 단촐한 말로 정상 참작에도 올려놓지 못했다. 동시에 진실을 피해 죽음을 택하는 인간의 신에 대한 소소한 복수인양 그대로 수용한 것이 비겁하다는 것이다. 상대가 이해를 못할 테니 상황을 인정해 버리는 냉소였다. 어차피 첫 발사 후의 네 방의 총격을 설명해야 하는 논증이 다시 골치 아팠던 것이다. 그날 사건의 발단도 레옹의 피격에 걱정하는 여자들의 울먹거림이나 재잘거림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다는 마음에 혼자 바닷가 사건 장소로 향한 것 아닌가. 이것은 복수로 인한 알리바이로 딱 맞아떨어지나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니 비겁하게 그 논증의 이유를 피하고 자신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부조리라는 생의 직소 퍼즐을 합리화시키고 그 속에 자기 조각을 끼어 완성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사회의 벽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일개 힘없는 존재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의 증언이나 변호사의 호소는 무기력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나머지 네 방을 설명하여도 아무도 사건의 맥락을 자기의 인식처럼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배심원은 그의 패륜이라는 단편의 퍼즐에 집착하지, 죄수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카뮈처럼 인식하고 있지 않은 사회적 현실이다. 누가 죽어야 할 사람이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심판하는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길 수는 있으나 생명의 심판자가 또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부조리라는 인식이, 정의와 역사의 중요도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인간사에서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의 논리가 사람을 죽인다는 끔찍한 진실이 뫼르소는 사형수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사회를 부정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저항이지만 그것에만 그치면 비겁함일 뿐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고뇌하고 통념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바라본다는 것은 획일화되지 않은 생명력이기도 하다. 같은 일상이라도 새살림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신선하게 바라보는 것. 그래서 자기만의 삶을 실현해 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세사에 차차 물들어가고 대부분은 이방인으로 남기보다 시류에 부합하여 다수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고독하게 번뇌하며 여세추이의 방식이 불편한 그들이 홀로 남아 이방인으로 불린다. 그들이 사는 사회가 부조리의 퍼즐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도 한 조각이다. 다른 데다 끼워 맞추는 것도 부조리이다. 그러니 어떤 그림으로 퍼즐의 조각을 잘랐는지는 인간이 헤아릴 수는 없어도 자기 조각이 어디에 끼워질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삶이다.



이미 카뮈는 ‘페스트’에서 의인 타루의 각성 계기를 다루며 어린 시절 판사인 아버지의 사형 선고에 대한 충격으로 인생의 고찰을 시작했다. 그 길로 타루가 선택한 삶은 그를 전염병 현장의 열렬한 봉사자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결과를 진지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 무의미하다기보다 생을 더욱 근엄히 여기는 까닭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어쩌면 뫼르소의 사형선고가 페스트의 타루가 바라보는 삶의 의미와 부딪히지만 궁극에는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형은 필연이었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위한 항변조차 변호사의 만류로 막혀버린 피고. 변호사의 통념은 그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햇빛이 강렬해서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은 여전히 빈약한 이유이므로. 그는 사형수가 되었고 자신의 사형일에 많은 이들이 오기를 바란다.


이로서 뫼르소 개인은 자신의 부조리와 함께 죽을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를 죽인 통념과 몰이해의 판결, 타인과 달랐던 세상의 의식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것은 죄인이라 판결한 자를 사형시키고 난 후도 여전히 계속되는 부조리이다. 제대로 증명되지 않은 이 사건 같은 인생의 무게를 다시 지고 언덕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살아있는 이들에게 남아있다. 외면하고 싶지만 흔들리다가는 햇살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던 사나이를 이해할지도!




어쩌면 모두가 이방인이었을지 모른다. 단지 생각이 달라서라기보다 어리숙했기 때문에,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편이 없었기 때문에! 한참을 헛바퀴만 돌다가 공동체에 주류가 아닌 자로 운명 지어진 상황에 외로워하며 삶은 늘 무거운 돌을 짊어진 시지포스처럼 좀처럼 불합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더 흘러 그건 주어진 세상사를 그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고 더 강렬하게 거부하고 개척해야 했음을 알았을 때 주먹의 힘은 많이 풀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향한 경멸에 찬 비판을 던지는 자에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비뚤어진 냉소주의로 보였으리라.


시류와 함께할 때 다수라는 이름으로 편협화되는 불편한 대중의 휩쓸림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인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하기보다 쓰윽 발라지는 버터처럼 물들어서 동류화하며 타협하고 살면 세상은 좀 만만해지던가. 여전히 아닌 걸, 아닌 걸 하며 돌아서야 한다.

그사이 자신에게는 우연한 강렬한 햇빛이 비추었어도 그것을 아름답게 즐겼고, 남의 송사에도 휘말리지 않았고 총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일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렇게 빛나는 빛이 에너지가 되고 도움이 되었으니 뫼르소처럼 사형수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고독한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밀물처럼 갑자기 몰려들다가 썰물처럼 쑥 빠져버리는 인간의 공허함에 자칭 뫼르소처럼 이방인이 되어 해변에 서 있을 때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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