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오니까 정말 좋구나.
- 그렇지? 근데 엄마는 왜 우리가 어디 가자고 하면 싫다는 소리부터 해?
- 너희들에게 민폐 될까 봐 그렇지.
- 엄마, 민폐는 우리의 제의를 무시하는 게 민폐야.
친정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네 식구들과 같이 가평으로 가을 나들이를 갔다.
안 가겠다고 하는 엄마를 감성으로 호소했다.
앞으로 엄마와 함께 추억 만들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지면 이젠 어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날이 금방 온다,
엄마만 빼놓고 가면 우리가 재밌게 놀 수 있겠느냐는 등
나의 엄살 섞인 말이 엄마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그래, 가자!
엄마는 늘 그랬다.
우리 세 딸들이 외식을 하자고 해도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다"
어디 어디가 좋으니 함께 가자고 해도 "나는 집이 최고다'
아버지 팔순에 베트남으로 가족여행 가자고 해도 " 나는 한국이 좋으니 너희들이나 아버지 모시고 갔다 와라."
외식 한 번 하려다 둘째와 엄마와의 언성이 높아지는 횟수가 잦아들고,
가까운 곳에 가서 1박 하려고 해도 언성이 높아지고,
기분 좋게 제의하다가 눈물 콧물 쏟고.
-엄마는 정말 이상해! 도저히 이해가 안 돼!
화가 잔득 난 둘째 여동생은 앞으로는 엄마와 동행하는 일은 아예 없을 거라며 엄마를 제외한 가족 여행을 계획하곤 했다. 큰딸인 나와 막내 여동생은 번갈아 가면서 침이 마르도록 엄마를 설득하는데,
그래도 좀 더 인생을 살아온 내 말이 엄마의 굳건한 고집의 끈을 헐겁게 풀어놓을 때가 있다.
엄마는 6살 때 엄마를 잃었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오빠 둘, 언니 그리고 여동생, 남동생 사이에서 그리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란 것 같지는 않다.
어려웠던 시절. 농촌에서의 생활은 더 궁핍했으리라.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일찌감치 미싱 일을 배웠다. 조그만 손으로 하루 종일 좁은 방 안에서 조각난 자신의 삶을 이어 붙이듯 재봉틀을 돌렸다.
늦은 밤까지 돌려야 겨우 밥 한끼 제 입으로 들어가는 고된 어린 소녀를 생각하면 우린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공손해져야하리.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져야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살아온 인생의 결정체들을 보면 때론 묻어버리고 싶고, 부셔버리고 싶고, 감춰버리고 싶은 것도 있을 테고, 때론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환호하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텐데 어찌
희노애락을 다 표현하며 살아 올 수 있었겠는가.
빈약한 감정마저 가슴에 묻어버리고 살아온 질곡의 흔적이 가늘고 마른 손가락 마디에 아픈 옹이로 박혀있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고생했네.
그때는 다 서러운 인생들이었어.
이렇게 일반화하고 그룹화시켜 볏단 묶듯 묶어 창고에 세워둔 엄마의 삶.
왜 이제야 엄마의 삶이 서럽게 다가오는 걸까.
왜 이제야 손가락 옹이가 가슴에 박히는 걸까.
왜 이제야 옹고집이라고 비난하던 자식들의 혈기에도 침묵하던 쪼그라든 입술이 보이는 걸까.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악다구니 쓰던 가시 같던 말들이 부메랑 되어 이 죄인에게 다 쏟아져버렸으면.
엄마도 여자였음을.
엄마도 빛나는 청춘이었음을.
누가 이 여인의 인생을 함부로 비난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옹고집이면 어떤가? 그 고집 때문에 태풍도 뚫고 온 인생인데.
엄마, 이 죄인들을 용서하지 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