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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금 Apr 07. 2021

너도 계획이 있구나



- 오늘 날씨도 좋은 데 멋진 곳에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올까?

- 지금?...... 싫어. 내일 가요.

- 왜?

- 갑자기 계획 없이 일 만드는 거 싫어요.







손가락으로 튕기면 쨍- 하고 소리가 날 것 같은 팽팽한 파란 하늘에, 꽃향기 묻은 바람 한 점이 스멀스멀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오길래 책 보다가 아들에게 던진 말이다. 갑자기 계획 없이? 반색하는 아들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래, 나도 그랬었지.

새해 첫날이 되면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한 달의 계획을 세우고, 한 달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하루의 계획을 세우며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계획하에 살았던 젊은 날들이 있었다. 공부가 그러했고, 운동이 그러했고, 독서가 그러했고, 만남이 그러했고, 여행이 그러했고 직장일이 그러했다. 손바닥만 한 수첩엔 그날그날 해야 할 일들을 꼼꼼히 적고 체크했다. 내 시간 안에 불쑥 처들어오는 일들을 만나면 참 불편해 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미루거나 넘기면 자책하고 반성하면서 나의 게으름과 단호하지 못한 나약한 의지를 한탄했다. 절반도 이루지 못하면서 새해가 되면 또 계획을 세운다. 올해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아냐?.... 새해가 거듭될수록 못난 자책감만 늘어갔다.

주변을 보니 헐렁헐렁 지내는 친구들이 더 창의적이고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성취감이 높았다.

나는 내 틀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하고 계획을 수정했다. 계획대로 실천하고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오늘 내가 본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느꼈고, 우연히 만난 누구와 어떤 얘기를 했으며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스치고 지나갔을 일상의 것들을 메모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바꾸었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함을 알게 되니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 밖을 나온 것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인생은 잘 짜인 극본이 아니라 여백 가운데 예상치 못한 우연과 만나면서 세밀하게 조각되고 색이 입혀지면서 '나'라는 작품이 완성돼 가는 것이 아닐까.

우연히 만나고, 뜻밖의 여행을 하고, 생각지 못한 일이 들어오고...

이런 뜻밖의 것들과 만나는 우연이 필연보다 훨씬 짜릿하고 훨씬 설레고 흥분된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이제는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조정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삶의 유연성이 생겼다.

<기생충> 영화에서 송강호가 아들에게 "넌 계획이 다 있었구나"하는 대사에서 아버지 송강호는 계획 없이 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살고 있다는 해석보다 살면서 계획이 왜 허무한 것이 되는지 인생의 뒷 지점쯤 오면 절로 알게 되기에, 송강호의 대사에 키득키득 웃다가 숨겨진 뜻에 생각이 머물게 된다.


파란 하늘 때문에, 살랑이는 바람 때문에, 아련히 떠오른 추억 때문에, 커피 향 때문에 문득, 하던 일 멈추고 일어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파고(波高)처럼 특별하고 불가불(不可不)때만 멈추는 것이 아닌 잔잔한 물결 속에서 마음이 닿아 부서지는 곳이 있다면 지금, 바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아들!

살다 보면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가 있고, 돌아 나와야 할 때가 있고, 웅덩이에 빠질 때가 있고, 들이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들이 받힐 때가 있더라. 이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만나고 생기고 부딪히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예상 못하는 일들이 파도처럼 밀어닥치기 때문에 우린 날마다 어지러움과 혼란함을 겪으며 사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질서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너는, 나는 시간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줄을 세우며 살아보고 싶었던 것일 거야. 그래. 네 계획대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아.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바꾸면 되는 것이니까.


달콤하게 쉬고 있는 너의 시간 속에 불쑥 처들어간 불청객과 같은 엄마의 말 때문에 좀 불편했지?

그런데 오늘만큼은 엄마를 위해 너의 계획을 잠깐 멈추면 안 될까?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 날씨 너무 죽여주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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