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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선생 Dec 20. 2020

시대를 초월한 대중과의 공명(共鳴)

[음악 에세이#11] 들국화와 그들의 첫 번째 앨범에 부쳐



 “맥주는 어릴 때부터 수입한 것만 먹는다니까?”, “햄버거는 무조건 맥도널드야”. “쟤는 외국 록, 블루스, 힙합 같은 것만 듣잖아.”, “지흔이는 국산 싫어해.”, “그냥 미국에서 태어났어야 돼.” 술자리에서 누군가 불을 붙이면 불처럼 지는, 나를 향한 친구들의 핀잔이다. 10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 한결같은 레퍼토리다. 20여 년이면 지겨울 법도 하건만, 그들은 여전히 내게 ‘문화 사대주의자’의 낙인을 쉴 새 없이 찍어댄다. 억울하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한국 대중음악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신중현, 산울림, 김민기, 김현식, 한영애, 나훈아, 조용필, 신해철, 김현철, 아이유와 심지어 BTS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많은 한국 대중음악가의 팬이다. 녀석들에게 스마트폰의 플레이리스트가 동서양의 화합을 꾀하고 있음을 어필해 보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향한 핀잔이 한잔 술에 씹어대는 맛있는 안주거리로는 제 격인 모양이다. 다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년이 넘도록 씹어대니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간 켜켜이 쌓인 이 恨을 소리로 토해냈다면, 아마 명창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음악에세이들의 제목을 들여다보다, 더 이상 녀석들을 원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음악 덕후의 보물창고> 수록된 앞선 글들이 모두 외국 음악과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친구들 사이에서 평생 ‘문화 사대주의자’의 낙인을 안고 살아야 할 판이었다. 큰일이었다. 그들과의 대화가 상상되자, 생각만으로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한 편정도는 꼭 국내 아티스트로 채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내게는 아직 한 척의 배가, 아니 한 편의 글이 남아있다. 차분히 한국의 아티스트들을 떠올려봤다. 길지 않은 국내 대중음악의 역사라곤 하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이가 너무 많아 난감하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1980년을 전후로 하여 시대를 구분하기로 한다. 80년대 이전의 음악들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들과의 추억은 대부분 지적 갈망에 의한 학습에서 시작됐으니 80년 이후에 데뷔한 아티스트를 고르는 편이 나을 것 같. 아무래도 그 이전에 데뷔한 아티스트들과는 동시대를 살지 못해 추억의 생동감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80년대 이후의 아티스트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라...몇몇 아티스트들이 날 망설이게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던 1987년의 봄을 기억한다. 주말이면 새로 사귄 친구와 손을 맡 잡고 신나게 목욕탕을 향하곤 했던 그 해 봄의 어느 날, 어김없이 목욕탕으로 향하던 우리는 여러 무리의 대학생 형들을 만났다. 목욕탕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골목길을 들어서고 벗어날 때마다 비슷한 무리와 마주쳤.

  그들은 비슷한 또래의 무리였지만, 역할은 무리마다 조금씩 달라 보였다. 일부는 망을 보듯 골목 사이를 지키고 있었고, 일부는 당시 (부산) 미문화원 앞 대로를 향해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긴장이 역력한 와중에도 꽤 밝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산 자여 따르라~’ 혹은 ‘행진~’등의 가사가 붙은 노래를 쉴 새 없이 흥얼거렸다.


  그로부터 두 어 시간 후, 우리는 목욕탕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그리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최루탄 때문이었다. 온 거리가 쾌쾌하고 매운 냄새로 가득했고, 골목에 북적이던 이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고통을 참기위해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에서, 우리는 그 형들과 다시 마주했다. 

  형들은 얼굴이며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 쫓기듯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난무했고, 먼 발치에서는 중무장한 전경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코를 막고있던 수건으로 형들의 피라도 닦아주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차마 그러지 못한 채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와야 했다.


  그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골목 사이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이 흥얼거리던 노래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는지,  그들이 왜 자신의 피를 흘려가며 광장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는지, 나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감사했다. 내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들의 피땀 섞인 투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시대의 억압에 희망을 노래하며 저항한 대중예술 집단이자 한국 대중음악을 진보시킨 기념비적인 아티스트. 빼어난 연주력과 특유의 서정성 위에 포크의 저항정신마저 계승해 한국적 록음악의 기틀을 마침내 완성한 밴드. 그리고 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목청 높여 불렀던 것으로 기억되는「행진」의 주인공. 1987년의  또렷한 기억이 내게 말다.


‘들국화’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최성원은 자신들의 음악이 록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한국 록음악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야만의 시대에 민중의 소리를 담아낸 용기있는 대중음악가였다는 사실을 떠나, 순수한 음악적 평가만으로도 들국화는 한국음악사에서 기념비적인 밴드다.

  영리한 감성이 묻어나는 최성원의 베이스와 허성욱의 견고한 피아노 연주, 최구희의 우직한 기타 톤과 곳곳에서 빛나는 조덕환의 재능, 충만한 록 필을 불어넣는 주찬권의 드러밍과 서정성을 살리는 이원재의 클라리넷 연주까지. 그들의 사운드는 그 누구의 것보다 독창적이었다.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되 급진하지 않는, 묵묵한 저항의지가 빛나는 가삿말을 자신들의 사운드 위에 새겼고, 이를 전인권의 외침에 담음으로써 마침내 전설(1집)을 잉태했다.


  또한 들국화는 하나의 밴드로서, 한국 록음악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그들의 음악은 ‘한국적’이다. 비록 외국의 악기와 곡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들의 음악 속에는 한국적 서정성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시대적 감성이 듬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국화의 음악에 담긴 시대적 감성은, 비단 80년대에 머물지 않는다. 힘겨운 삶신음하는 우리네 어깨를 토닥이던 그들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난 35년간 한 번도 그들을 놓지 않았고, 끊임없이 공명해 왔다. 그때도 지금도, 민초의 고단한 삶은 다르지 않다. 들국화의 음악에 짙게 배인 묵직한 울림이, 시대를 초월해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신한다. 35년의 시간이 더 흐른다해도, 그들의 음악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변함 없을 것임을. 어떤 세상과 어떤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그들의 음악은 대중의 지친 마음을 기꺼이 어루만져 줄 것임을. 그리고 그 때에도, 내게는 대한민국 최고의 밴드로 기억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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