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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선생 Sep 17. 2020

가을의 광기를 치유한, 그들만의 그루브

[음악에세이#10]Jamiroquai의 「Virtual Insanity」



  황엽과 갈엽 사이로 얼굴 내민 홍엽이 아른거린다. 마스크 뒤로 숨을 내쉬기가 한결 편해지고, 책장을 넘기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을 보니 가을인가 보다.


  가을만 되면 걱정이 밀려오던 시절이 있었다. 이 계절과 내 궁합은 언제나 신통치 않았다. 내 청춘의 가을은 언제나 심신이 피폐해지고야 마는, 그런 계절이었다. 이 계절에 내 삶 속 대부분의 이별을 겪어야 했고, 머릿속을 부유하던 공상은 크고 작은 실패로 쏟아져 광기와 자학의 한바탕 놀이판으로 이어지곤 했다.


  가을만 되면 어김없이 도지던 이 ‘지랄병’을 치유한 것은, 역시나 음악이었다.


  가을만 되면 광인(狂人)이 되고 마는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족히 열두 번은 심사(心事)가 바뀌었고, 바뀌는 속도가 빛과 같았다. 변덕스러운 마음이 남 아닌 제 것일 진데, 그게 또 꼴사나워 제 모습에 혀를 끌끌 차 댔다. 읽고 읽어도 이해 못할 철학서를 붙잡고 쏟아내던 욕지거리는 일과의 하이라이트.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었다면, 필시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내 지적 수준 경멸했을 것이다. 지랄병도 그런 지랄병이 없던 시절이었다. 요즘도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될 때면, 하룻밤에도 수십  이불을 걷어차곤 한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이 계절을 버텨내기 위해 酒의 가호에 더욱 집착하곤 했다. 나는 주변인 사이에서 꽤 소문난 주당이었고, 일단 자리를 펴면 최소 두 번을 옮길 때까지 자리를 파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내 술자리의 마지막 여정은 늘 Bar였는데, 내가 자주 찾던 몇 군데 단골가게의 컴퓨터에는 항상 나를 위한 음악 폴더와 음악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보통 가을이 가까워지면 조용한 팝 발라드나 정통 Jazz 혹은 블루스 계열의 록 음악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들은 그 시절의 내게 필요한 음악이 못되었다. 조용한 사색과 따뜻한 울림은, 그 시절의 내 정신건강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심란한 채로 가라앉은 내 영혼을 심해로 밀어 넣어 버릴 수는 없는 거잖나. 그래서 가을이면 다양한 장르의 하모니로 흥겨운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Acid Jazz계열의 곡들이 그 폴더들을 채우곤 했다.


  처음 Acid Jazz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된 건, 학창 시절 Incognito의 음악을 접하고부터였다. 재즈 베이스에 R&B를 연상시키는 멜로디, 거기에 업템포의 디스코가 버무려진 그들의 음악은 놀랍고 매력적이었다. 나는 블루이 마우닉의 음악적 스펙트럼과 깊이가 만들어내는 Incognito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Brand New Heavies, US3와 같은 밴드의 곡을 들으며 Acid Jazz라는 장르의 팬이 됐다. 그러던 1997년, 마침내 Jamiroquai를 만났다.


그들 아니 제이케이는 이 앨범 이후, 다양한 장르로의 변절(?)을 시도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재즈, 디스코, 펑크(funk), 힙합에 이르기까지 장르적 구분을 무색게 하며 관악과 타악을 넘나드는 이 다채로운 장르 안에서도, Jamiroquai는 독보적인 독창성을  뿜어내는 밴드다. 이는 천재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젠더와 리더 제이케이가 만들어내는, 오직 그들만의 그루브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세 번째 앨범 <Travelling Without Moving>에 수록된 「Virtual Insanity」는 ‘Jamiroquai 식 그루브의 정수’라고 할만한 명곡이다.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휴대전화 벨소리를 「Virtual Insanity」로 바꾸는 것 일만큼, 이 곡에 대한 나의 애정은 유별났다. 이 곡은 가을이면 어디로 튈지 모를 내 마음에 리듬을 부여했고, 일그러진 세상을 꼬집는 가삿말로 날 선 내 치기(稚氣)를 한 결 누그러뜨리곤 했다. 가을만 되면 도지던 내 지랄병을 치유하는 명약이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역병이 한 풀 꺾이고 나면, 가을밤 친애하는 벗과 함께 한잔하러 나갈 참이다. 잠잠해진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지만, 지랄병엔 완치가 없다. 방구석에서 공상만 하다 또 병이 도지기 전에, 내 명약 담을 폴더 하나쯤은 새로 만들어 놓아야 하지 싶다.  폴더의 첫 번째 곡은 당연히 「Virtual Insanity」 될 것이다.
 

  어쭈, 벌 어깨가 들썩인다.



# 추천 Playlist

- Virtual Insanity

- Cosmic Girl

- High Time

- Bullet

- Travelling Without Mo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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