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처음 우연히 그녀의 꽃집에 들어섰을 때 만해도 이러한 만남이 시작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레코드가게도 서점도 사라져 버린 재개발지역의 허름한 거리에 생각지도 않은 꽃집이 문을 열었을 때 마치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반가웠다. 쇼윈도 앞에는 선이 아름다운 유리 화병들이 소살 대며 봄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다른 쪽 벽엔 널따란 초록의 발포지 위로 희귀한 꽃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뜻밖의 볼거리를 안겨주었다. 하나하나에 시선을 옮기며 주인이 궁금해질 무렵 슬쩍 파티션 안쪽을 들여다본 순간 판 박히듯 눈이 멈추었다. 투명테이블과 단순한 팔걸이의자 하나가 있을 뿐인 좁은 공간엔, 풍경화와 정물화 두 점, 이젤과 스케치의 흔적들, 낮은 책장에 꼼꼼히 늘어선 소묘와 수채화 이론서들이 주인의 일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듯한 감동과 풋풋한 설렘이 밀려왔다. 결국 그날은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어린 시절 오빠는 늘 이젤을 들고 다녔다. 언제라도 시선을 끄는 풍경이 있으면 어디든 이젤을 펼치고 스케치를 했다. 비싼 유화물감을 사기 위해 겨울이면 차디찬 다락방에서 굽은 손을 불어가며 카드를 그려 내다 팔곤 했다. 새 화구를 손에 넣기라도 하면 세상을 모두 얻은 듯 그렇게 행복해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날마다 미술실에 틀어박혀 있던 오빠는 늘 몰매를 맞아야 했고 결국 아버지의 만류로 그림을 접어야만 했다. 오빠에게선 더 이상 예전의 행복의 기미는 없었다. 그 후 내게 있어서의 그림 한 점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누군가의 생존을 건 투쟁이며 아픔인 동시에, 인간의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화가 아닌 반추상이나 추상화를 대할 때면 표현되지 않은 화가의 열정이 가슴을 뒤덮어 숨이 막힐 정도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것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루’를 보았을 때의 그것과도 흡사해서, 남편이 죽은 직후 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주인공(줄리엣 비노쉬)이 문득 수영장에 들어가 푸른 물속에 잠긴 채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을 때의 그 긴 침묵의 순간에, 배우보다는 오히려 내 쪽에서 숨 막히는 고통을 느껴야 했던 것과도 같았다. 오빠가 그림에 매달려 몸살을 앓던 17세 즈음에 나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눈을 반짝이던 친구를 짝으로 얻었다. 함께 헤르만 헷세에 파묻혀 지냈고 화실이 즐비했던 서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거리를 사랑했으며, 회색노트에 그림을 그리며 교환일기를 나누었던 17세는, 그 후 단지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고단한 삶을 부추기곤 하였는데... 꽃집을 나오면서 그 오랜 기억들이 한꺼번에 꿈틀거리며 되살아 나왔다.
며칠 후 그곳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주인여자를 보았다. 키가 크고 긴 머리에 푸른 꽃무늬 스카프를 어깨에 두른 그녀는 50대 후반을 넘긴 듯 보였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를 가졌다. 커다란 두 눈은 예전에는 아무와도 친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그런 표정이어서, 어쩐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타인과의 만남에 서투른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그림에 대해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성적이어서 평상시엔 말이 없지만 관심 있는 분야를 건드리면 한껏 여물었던 봉숭아처럼 툭 터져 나오는 스타일도 역시 나와 꼭 닮았다. 잠시 머쓱해진 나는 미리 작정이라도 한 듯 클레로덴드륨을 집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엔 그즈음 한창 붐을 이루던 로즈메리나 라벤더 같은 허브 한 그루도 없었거니와 꽃집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생화는 아예 갖추지 않았으며, 그저 푸른 잎새 만이 싱그러운 마리안느나 파키라, 고무나무와 선인장류 그리고 약간의 분재가 고작이었기에 하얀 다이아몬드 꽃받침 속에서 진홍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던 클레로덴드륨만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만남이 계속되었고 어느 때라도 손님이 없으면 원두커피를 내어주며 대화하기를 즐겼는데 그럴 때면 마치 이제껏 한 번도 모국어로 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폭발적으로 이야기를 터뜨리곤 했다. 그녀는 무척 고독했던 것이다. 남편은 사업차 해외에 나가있고 그녀에게 그림을 권하던 딸은 이미 다 자라 그녀를 떠났다. 그동안 동호회에서 합동 전시회를 갖기도 했고 개인전도 한 차례 열었다며 팸플릿을 펼쳐 보이던 그녀의 손 마디마디엔 높은 긍지가 엿보였다. 그리고 왜 화가들이 프랑스 파리를 꿈꾸는지는 그곳 박물관에 가보면 알 수 있다는 것과, 마치 거룩한 의무인 양, 수없이 아이들을 박물관에 데리고 다니는 부모들이며, 그들에게 자신의 넘쳐흐르는 작품에 대한 애정을 담아 상냥하게 화가의 생애며 작품의 제작배경까지도 설명해 주는 늙은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와, 자신은 어느 나라에 가든 맨 처음 가보는 곳이 박물관이라는 것, 그것은 그곳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바로미터라는 것, 그리고 북구의 헝가리며 러시아에서는 어떠했던가를 청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녀의 두 눈은 바다와 같이 어둡고 깊어서 무수한 보물이 숨겨진 듯 반짝이고 있었는데, 반면 그 한편에는 어두운 욕망과 싸우는 거세된 남성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처가 배어있는 것이었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에 대해서도 민감하기 때문에 서로를 상하는 일이 없다. 그녀는 내가 항상 웃고 있음이 항상 울고 있던 나날들의 반증임을 아는 듯한 흔치 않은 여자였다. 그녀는 상처가 깊을수록 얼마나 편안하게 타인을 감싸 안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린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늘 서로에게 활기를 주었다. 언젠가 영화이야기가 나와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이르렀을 때엔 그녀가 얼마나 메릴 스트립에 반했으며 그녀의 연기를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표현하려다 기진할 정도였고 당시 만나는 친구들마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을 묻느라 얼마나 분주했던가를 이야기하며 우린 엄청나게 웃어댔다.
바람이 차갑게 거리를 쓸던 시월 중순쯤 더 이상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혹시나 내일이면 하고 기다렸지만 두 주일이 넘도록 셔터는 굳게 닫혀있었다. 나는 그녀의 일이 궁금해서 가슴을 태웠다. 거리마저 잎을 떨군 나무들로 황량해져 있어서 갑작스러운 그녀와의 단절은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유리문이 열려있어 반갑게 들어섰는데, 그녀의 얼굴엔 이미 예전의 생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이마와 눈가에 커다란 멍이 채 가라앉지 않아 거무스름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놀라서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그녀는 자신의 오랜 지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때로 의식을 잃고 아파트 턱 앞에서 쓰러진다거나, 낯선 거리를 걷다가 별안간 쓰러져 구급차 신세를 져야 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자신의 무능력을 견디지 못해서 꽃집을 차렸지만 새벽시장을 다닐 수 있는 여력조차 없어서 생화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며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물이 맺혀 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간절하게 그녀의 소생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와줄 수 있느냐고. 무슨 일일까 놀라서 달려간 나를 보더니 문득 깊게 포옹을 하였다. 짧은 침묵과 오열이 있었다. 가게는 거의 물건이 정리되어 텅 비었고, 그녀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홀로서기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는데 그때의 쓰라림은 마치 나의 삶조차도 그녀와 더불어 무너져 내리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짐꾼들이 들어섰고 더 이상의 작별인사는 없었다. 다음날 그곳에는 이동통신 사무실이 들어서 있었다. 꽃집이 없는 그 거리는 이젠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고 덩굴만 늘어가는 클레로덴드륨을 보는 것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