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강하다. 수직으로 강하게 내려 꽂힌다. 드문드문 있는 가로수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강한 햇빛이다. 건물 유리창,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보행자들의 스마트폰에 햇빛이 반사된다. 모든 곳이 밝다. 나에게 숨을 곳은 없다고 말하는 듯이. 태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방법뿐이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일단 회사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서 점심을 먹을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지금 심정으로는 에어컨 냉기가 가득한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가로수에서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울 만큼 울려 퍼진다. 이마의 땀을 닦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빌딩 사이로 달이 보인다. 낮에 뜬 달.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상황인지 잠시 잊은 채 정신없이 달을 바라보았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무엇일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낮에 뜬, 흐릿한 달. 이런 달이 나오는 영화 장면을 보았던가. 아니면 과거의 어느 사건일까. 무언가 떠올려내려고 골똘히 생각해 보지만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뿌옇다. 그 안개 너머에 무언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 하지만 지금은 그 안개를 헤쳐나가기 적합한 상황은 아니다. 햇빛은 내 살갗을 태우고 있고 배도 고프다. 일단 점심을 먹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밀려있던 일들이 정리가 된 간만의 야근 없는 저녁의 퇴근길.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가는 길에 문득 달을 보았다. 달은 빌딩 사이로 강렬히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지난번 점심에 본 낮에 뜬 달이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때의 달에 대해, 달을 보면서 든 기시감에 대해 다시금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마침내 생각해 냈다. 대학생 시절 산속의 숲에서 보았던 달, 기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았던 강렬한 태양 옆의 흐릿한 달을 떠올렸다. 그 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어릴 적 과거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한다. 어떤 감정과 그로 인한 내 증상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도 한데 뒤엉켜있기에, 언제 일어났는지 무엇이 먼저인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워드 파일을 켰다. 천천히 기억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 위해서.
14살의 가을밤이었다. 학원에 갔다 오니 부모님 두 분 다 집에 계시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 두 분 다 외가로 가셨다. 홀로 남은 집에서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다가, 밤이 되어 졸려서 이불을 깔고 누웠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내 방에 홀로. 같은 건물에는 노래방이 있어서 어렴풋하게 노래가 들려온다. 부모님은 아마도 새벽 늦게 돌아오실 것이다. 눈을 감고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내일은 무슨 과목 수업을 듣고, 어떤 숙제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누워있다가 두 눈을 뜬다. 눈을 떠도 감은 것처럼 앞이 캄캄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적막하다. 세상에 나 홀로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래층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노랫소리마저도 마치 세상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이 멀게 들린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우주를 상상한다. 보이는 것 하나 없는 깜깜하고 텅 빈 우주를. 시골이나 산속 공기가 좋고 빛이 적은 장소에서는 운이 좋다면 밤하늘 가득히 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별들은 서로 모여서 교류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별과 별 사이는 굉장히 멀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이고,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4광년 떨어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조차도 가는데 4년이 걸린다. 저 하늘의 별들은 그보다 수십 배, 수백 수천 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어마어마한 공간의 간극은 시간의 단절을 야기한다. 밤하늘의 별들은 서로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학생의 나는 만약 내가 별이라면, 하고 생각한다. 내가 별이라면 주변에는 돌덩이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저 멀리 흐릿한 별빛만 간간이 보이는 공허 속에서 나는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고 사소하다. 나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저 조용하게 희미한 빛을 내다 서서히 희미해지며 사라져 간다. 왠지 눈물이 난다. 캄캄하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 감각을 느끼며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당연히도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조금 변했다.
그 경험 이후로 가끔 악몽을 꾼다. 꿈의 내용은 으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지만 비슷한 악몽을 계속해서 꾸다 보니 뇌리에 박혔다. 세부 사항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악몽들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나는 항상 홀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텅 빈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있고, 운동장 트랙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있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거나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꿈이 언제나 그렇듯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불안감이 엄습한다. 무언가 나를 쫓고 있다는 불안감.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나는 정신없이 어딘가로 달려간다. 도망치기 시작하자마자 뒤에서는 기척이 들린다. 무언가 나를 쫓아오고 있다. 나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 계속 달린다. 어떻게든 집까지 도망치고 난 다음에야 안심한다. 겨우 도망쳤다, 하고. 안심한 후 침대에 누울 때 생각해 낸다. ‘이건 꿈이잖아. 바보같이. 또 그 악몽이네. 빨리 잠에서 깨야겠다.’ 그러고는 현실에서 눈을 뜬다.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직 꿈 속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첫 번째 장면으로, 그러니까 어디선가 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돌아간다.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도망치고, 안심하고, 꿈인 것을 깨닫고, 잠을 깬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꿈 속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한다. 얼마나 반복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된다. 꿈속의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어나도 꿈 속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로 잠에서 깨어난다. 깨고 난 이후에도 잠시 동안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마치 몇 년의 시간을 꿈에서 헤맨 듯한 생각도 들지만, 시계를 보면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캄캄한 새벽이다. 다시 잠에 들려고 하지만, 이때 잠들면 틀림없이 다시금 악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하릴없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거나, 혹은 졸려서 도저히 잠을 참지 못해 반복되는 악몽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며 밤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면 제 컨디션이 아니다. 단순히 잠을 자지 못해 괴로운 것 이외에도 하루종일 기분이 축 처진채로 올라오지 않는다. 영혼을 땅 속 깊이 파묻고 뚜껑을 덮어버린 것처럼. 영혼이 떨어져 나온 몸은 어떻게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그런 날 나는 가능하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방 안에 틀어박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릴 뿐이다.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이 악몽은 불현듯 찾아온다. 패턴이 없다. 내 몸 상태가 어떻든,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든 그냥 누워서 보냈든, 배고프든 아니든, 전날 잠을 충분히 취했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악몽과 그 후의 틀어박힘을 걱정한다.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그런 악몽과 함께 나는 자랐고,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