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똥꿈을 꾸었다.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꿈결에 부욱하고 똥을 지려 급히 뒤를 손으로 받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뒤처리를 하는 꿈이었다.
사고에 비해서는 비교적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하면서 꿈이 깼다.
똥꿈은 처음인데 꿈에 똥을 보면 재수가 좋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오늘은 수행사 최종 발표가 있는 날인데 똥꿈이라니... 재수가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그닥 좋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발표장이 있는 서울역 환승센터로 가는 M 버스가 연속으로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간다. 버스 앱을 보니 다음 M 버스도 이전 정류장에서 빈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문막에서 지내느라 서울 출근 전쟁에 대한 감이 떨어진 탓일까,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9시가 가까운 이 시간에 이렇게 버스 좌석이 없다는 건 아무리 월요일이지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서울역으로 가는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가 오전 9시 5분, 발표 시간까지는 한 시간 남짓, 빠듯하지만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고, 정신없이 뛰어 발표장에 도착하니 10분 후에 발표가 시작된다고 했다. 남은 한숨을 마저 돌리며 발표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발표 시간이 끝나자 첫 발표자여서 그랬는지, 아님 발표 자료 준비가 부실했던 때문인지 심사위원들의 공격적인 질의가 이어졌다. 10분 동안 방어와 수긍의 변을 적절히 구사하며 약간의 비굴함을 머금은 해맑은 인사를 드리고 발표장을 나서며 문득 어젯밤 똥꿈이 생각났다.
아, 이렇게 처리를 하게 되었구나.
집에 도착하니 또 문제가 발생했다.
난방용 밸브에서 누수가 생겨 오후에 업체에서 보수공사를 진행하였고 걱정했던 것보단 공사 범위가 크지 않아 두어 시간 만에 공사는 완료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배관 공사 영향으로 보일러가 가동이 되질 않는다.
계속 01번 에러 메시지가 뜨는데 배관 수리기사님 왈, 가끔 이런 경우가 있는데 보일러 회사에 AS를 신청하란다. 1588로 시작되는 보일러 회사의 AS 콜에는 사람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로 이어지는 끝없이 반복되는 멘트만 있을 뿐.
유튜브에 의하면 에러 01은 착화가 안될 때 뜨는 메시지라고 했다. 내친김에 보일러 전면 상판을 해체하여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착화가 안 되는 거면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보일러 수리 영상들 중에 우리 집 보일러와 같은 기종은 없었지만 보일러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복잡하게 연결된 전선들의 접촉 불량 부분이 있는지 살폈고, 보일러 내부에 습기가 있는 듯하여 헤어드라이어로 한동안 말리기도 해 봤지만 여전히 에러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전화기에서는 두 시간째 같은 멘트가 이어지고 있다.
"기온 급강하로 인입콜이 많아 모든 상담사가 통화 중이어서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며 현재 대기 중인 고객은 50명이며..." 두 시간째 대기인 수는 50명이란다. 멘트대로 기온이 급강하했는데 오늘 중으로 보일러를 고칠 수 있을까? 짜증이 났고 화도 났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한번 고쳐보자는 오기가 더 크게 발동했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가만히 보일러 원통을 살펴보니 원통 내부를 볼 수 있는 엄지손톱 크기의 유리창이 눈에 띄었다. 시동 스위치를 켰음에도 원통 안에 불꽃이 일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스레인지를 켤 때 스파크가 먼저 일어야 불꽃이 점화되는 것과 같은 원리일 테지,
그래, 문제는 스파크야!
원통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원통 밑판을 고정하고 있는 나사못을 십자드라이버로 풀기 시작했다. 두 개째 나사못이 빠져나오는 순간 놀랍게도 원통 안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닌가.
세상에, 불꽃이 일어야 할 보일러에서 물이 쏟아지다니...배관수리시 밸브 물을 뺄 때 역류가 일어났던 것인가...
그런 중에 드디어 1588에서는 녹음이 아닌 실제 음성이 들려왔고, 결코 정중 하달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AS 접수가 되었다. 접수가 너무 늦어 오늘 중으로는 방문이 불가할 수 있는 점 양해 바란다는 상담원의 멘트가 차라리 슬프게 들렸다. 내 안에 이는 스파크를 보일러 안에 옮길 수만 있다면...
마른걸레로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헤어드라이어로 내부를 말리기를 수차례, 드디어 시동 스위치에 불꽃이 반응했다. 성공이다.
이어 불꽃이 원통 내부를 환하게 밝히며 활활 타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온수를 틀어보았다. 미지근하게 물이 데워지고 있었다.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승리이다.
똥꿈꾼 하루의 마무리는 상쾌함이다.
#똥꿈꾼 날, #재수 좋은 날, #셀프 보일러 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