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이 돌았다. 역시나,
쉬이 잠들지 못했고, 스트레스 받아서 폭식하고 과음하고,
소화되지 못한 속을 안고 잠이 들었고,
스트레스의 악순환을 돌다가 잠이 안와 추운 날씨에 끊임없이 산책을 하다가,
결국 감기에 걸렸다.
너무 서러웠다. 그의 나비와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을 보고서는
계속해서 마음을 가라앉았고, 그래도 이겨내야지 마음을 먹고 다시 에너지를 짜냈다가
다시 바닷속에 가라앉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었다.
드라마를 보면 첫 눈에 반하는 설정을 보고 왜 저렇게 둘이 쌓은 서사도 없으면서 구구절절하지,
심지어 자신의 삶을 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갔는데,
그를 만나고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 눈에 반해 그 어린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거?
나는 이제 이해 가능해, 만난지 한달 된 그에게 내 모든 감정을 내던지고,
그가 나를 볼 수만 있다면 모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수는 아직 안끝났고, 계속 그를 만나야했다.
연수 동기들끼리 틈이 비는 날에 놀러가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친한 사이로 오해받은 그와 나는 두 대로 나눠 탄 차에서 후발대로
두번째 차에 단 둘이 타게 됐다.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조수석에 탄 사람의 예의 상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매일 데면데면하던 내가 또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주제나 쏟아지는 내가 그에게는 또 이상해보였겠지.
하지만 나도 내 스스로를 알 수 없었다. 그 날도 역시나 그랬다.
그를 만난 이후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 뿐이었다.
"우리 연수 끝나고 주어지는 5일 휴가는 뭐할거야?"
"나 번지점프하러갈거야"
와, 이것 또한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고, 이 대답 또한 골때리게 했다.
"번지점프?"
"응, 그런 무모한 짓 해보고 싶어.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우와, 진짜 이 대답 또한 나를 미치게 했다.
무모한 짓을 해보고 싶다니.
이렇게 입체적이고 자신의 세계가 뚜렷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니.
수현이가 너무 미치게 부러웠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번지점프 무섭지 않겠어? 나같으면 밑에는 못 볼거 같아"
"밑에 똑바로 보고 뛰어야지, 안전장치 다 했잖아. 그 경험 한순간 한순간 다 겪어낼거야"
감기 기운에 때려먹은 약국에서 파는 상비 감기약 기운이 더더욱
나의 이성을 빼앗고 정상으로 생각할 수 없게 했다.
한순간 한순간을 다 겪겠다는 그가 너무 매력적이었고,
더 갖고 싶었고, 그가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는 바보야."
그가 헛웃었다. "그건 무슨 얘기야"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준비가 되어있는 나를 몰라보는 너는 바보야.
그 이후로 어떤 정신으로 다른 지역까지 놀러가서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사진첩에 남겨진 사진을 보니 나름 그와 다정한 포즈로 단체사진도 찍었더라.
이후에 보고 속이 뒤집히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그를 두고 매번 열이 받다니. 나도 참 모난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녀온 후, 나는 심한 독감으로 앓아 누웠다.
1층 카페 사장님도,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다른 동기도 나를 걱정했고 한 번씩 내 방을 두드렸다.
귀찮아서 집의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고마웠지만,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내심 기다리던 반가운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고. 역시나 내 열병이 낫는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한참을 앓다 눈을 떴을때,
그가 내 침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너무도 다정히 나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날것 같았다.
그래도 아프니까 나를 봐주러 왔구나.
힘든 와중에도 그를 맞이하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켰다.
"왜 왔어"
그는 아무말 하지 않았고, 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몸을 쓸었고, 옷을 벗었다.
아프지만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추운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자체가 계속 되었으면 했다.
그가 정말 나의 체온을 원하는 것 같았고,
나는 이 순간을 너무나 기다려왔다.
따스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방에서
모든 것이 충족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가 입을 떼고 내 몸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든 순간,
눈이 떠졌고, 아무것도 없는 천장이 보였고,
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가라앉았고,
이 방에는 나 혼자였다.
근데 더 어이가 없었던 건,
침대맡 탁자에
내가 본적 없는 약봉지가 놓여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놓고 간 것 같은 그 약봉지를 보자마자,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역겨움에 그 봉지를
바로 집어던졌다.
또 한번 혼자 있는 내가, 내 방이 비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