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가 나의 생일을 알뜰살뜰히 챙길 의무는 없었고,
나 혼자 부딪히며 느끼는 감정에 그가 답해줄 의무도 없었다.
나 또한 그걸 바랄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대하고 아쉬웠고 닿고 싶었고 서운했다.
롤러코스터에 혼자 올라가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땅에 쳐박혔음에도 여전히 그에게 바라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어설픈 복수심이나 분노를 넘어
무기력해졌다.
혼자서 이렇게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그를 보고싶지 않고 피하고 싶고 아예 그의 존재를 지우고 싶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지워졌으면 했다.
그럼에도 아직 연수는 진행 중이었고, 친구들은 1층에 계속 모였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마주칠 수 밖에 없었고, 나 또한 이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나의 생일 이후 동기들끼리 모이는 자리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연수를 받을때는 어쩔수 없이 내 시선에 그가 걸렸지만 불편한 마음 가득 안고 그 또한 조금이라도 불편하길 바랄 뿐,
그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을 지내던 나날이 지나고,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모이는 자리에 그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얘가 너네 보고싶대서”
그의 옆에는 하얀 얼굴에 홍조를 띈, 나와는 정반대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 사이에 있던 나를 그녀가 단박에 아는척을 해왔다.
“지현아 나 기억 안나? 나 나라고 6반! 수현“
그랬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7년을 만나고, 1년 넘게 헤어졌던 그녀는 나의 동창이었다.
“우연히 꽃다발을 사러 꽃집을 갔다가 다시 마주쳤어"
"그리고 제가 오빠한테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그 날엔 대답을 안 하더니 다음날 와서 다시 만나보자고 하더라구요."
얘길 들어보니 하필이면 내가 그를 기다리던 그 기나긴 밤, 그들은 우연히 마주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그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 수신되지 않고 그 밤에 철저히 외면 당했던 그 꽃다발은 그녀가 만들었던 꽃다발이었을까
1년을 헤어져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될 일인가?
근데 생각해보면 그와 그녀의 만남은,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 그 자체였다.
같은 동네에서 1년간 마주치며 서로를 알아갔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충분히 알아간 다음 사귀기 시작해 7년을 만난 그들이었다.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야 감정의 확신이 생기고 안정적인 마음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
그가 헤어지고 전국일주를 돌만큼 힘들어하던 유일한 상대,
20대 거의 대부분을 서로에게 바친 운명같은 상대,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들의 관계였다.
그리고 수현이는 정말 완벽하게도 ‘애인’이라고 부르기에 완벽한 사람이었다.
흰 얼굴에 차분한 성향, 꽃을 좋아하고 나비를 좋아하고, 느리게 하지만 다정히 말하는 그녀.
꽃을 좋아하던 그녀는 플로리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지현아, 나 너 가끔 생각나고 보고싶었는데, 오빠가 동기들이랑 찍은 사진을 보고 너가 있길래 내가 꼭 데려와달라고 했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동기들이 물었다.
“왜 지현이가 보고싶었어요?” “지현이는 고등학교 때 어땠어요?”
“지현이는 고등학교 때 은근 인싸였어요! 시끄럽게 휘젓고 다니진 않지만 거의 모든 선후배들과 어느샌가 친해져있었고,
모든 소문들을 항상 지현이는 알고 있었는데, 근데 그걸 떠들고 다니지 않았어요.
선후배들이 다 좋아하는 친구였고, 조용했던 저에게도 먼저 다가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서 참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냥 싫은 소리 하기 싫어서 고민상담을 군말없이 들어주던게 나중엔 소문이 다 나서 어쩌다보니 모든 소문을 알고 있었고,
만만하고 무난한 애여서 일진이든 모범생이든 덕후든 나한테 조용히 말을 걸면 또 편견없이 대하고,
그랬을 뿐인데 저렇게 포장해서 나를 기억하다니. 참 민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예쁘게 말하는 그녀를 앞에두고 나는 참 많이 초라해졌다.
수현이는 곧잘 동기들과 얘기를 나누고 잘 어울렸다.
그를 화제로 두고 여러 얘기를 나누며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그들의 견고한 사이를 내가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이나 없어보였다.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섰고,
볼일을 보고 세면대에 있던 인센스 홀더 위의 나비 장식을 물끄러미 보았다.
맞다. 나비.
그녀는 나비를 좋아했다. 참으로 엉뚱하고 조용하지만 좀만 그녀를 관찰하다보면 저절로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이었다.
학교 뒷산에서 나비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쉬는 시간마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키 큰 선배를 두고 속앓이 중이었다.
그녀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싸였던 나는 그에게 어렵게 다가갔고 말을 텄고 친해지기까지도 오래걸렸다.
계속해서 말을 걸고 그를 쳐다보던 나는, 어쩔수 없이 그 선배의 시선이 수현이에게 가닿은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교 뒷산에서 나비를 보던 그녀에게, 다가가 함께 있는 선배를 보며,
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란거, 그게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속상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다.
그랬다. 그 때와 똑같은 처음 겪는 감정과 무기력함에 또 한번 좌절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수현이가 왔다.
억지로 웃으며 알은체를 하고 나가려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현아, 이렇게 봐서 너무 반갑다.”
“그래, 나도 이렇게 너를 볼 줄 몰랐어! 심지어 그렇게 오빠랑 오래된 사이라니, 너무 신기해“
“나도 이렇게 만나서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어”
“그래그래, 잘 놀다 가고 갈때 번호 알려줘”
수현이는 또 살포시 웃었다.
“여전히 살갑고 친근하구나. 고등학교때 너의 그런 성격이 부러웠는데, 나는 그냥 그런 성격이 안된다는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어”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부럽다는거야?
너무나도 울고 싶어졌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 나 먼저 나가 있을게!”
애써 웃으며, 아니 웃었나? 나는 웃었다고 생각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잘못은 없었지만,
화장실을 나와서 바로 그를 한번 더 쏘아보고는,
애써 웃으며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바로 자리를 떴다.
정말 그를 좋아하고서는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