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유진 EUGENIA Oct 12. 2024

최후에서 최초를, “끝에서 거꾸로 보기”

클래식 음악으로 죽음 읽기, 세이킬로스의 노래

세이킬로스의 노래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복원한 노래



가장 최초의 음악에 대한 기록은 무엇일까요? 저도 한 때 이런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음악사에서 흔히들 거론되는 음악은 바로 세이킬로스의 비문입니다. 기원전 1세기 경 고대 그리스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은 튀르키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죽음을 기리는 의미로 쓰였는데요. 누군가의 죽음, 즉 최후가 세계 최초로 남은 음악의 기록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음악은 어떤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을까요?


세이킬로스의 비문 해석

살아있는 동안 마음을 편하게 하세요 
아무것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세요
삶은 너무 짧고, 시간은 흐르나니


정확한 음고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세이킬로스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비문이 남긴 흔적으로 복원된 삶과 음악의 의미가 보이고 들리네요. 이렇게 보다 보면 역사라는 것은 참 신비하지요.


왜인지 모르게 평안하기까지 한 이 음악을 듣다 보면, 나의 최후의 비문에는 어떤 글이 적히고, 어떤 울림으로 사람들의 곁에 남을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스스로 편하게 눈을 감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남은 사람들이 어떤 추모를 해주길 바라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얻게 됩니다.


실제 현대 철학가 피터 비에리는 책 「삶의 격」에서 "끝에서 거꾸로 보기"를 이야기합니다. 흔히들 죽음의 위기를 맞는 순간, 기억이 주마등을 스쳐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곤 하죠. 그 경험을 통하여 삶이 180도 바뀐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경외와 공감을 이끌어 내곤 합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끝에서 거꾸로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피터 비에리는 삶의 통찰을 얻기 위해 일부러 위기를 겪을 필요는 없지만, 최후의 순간에 인생이 주마등을 스쳐가듯, 지금까지의 인생을 거꾸로 다시 돌아보라 권유하죠.


저도 몇 년 전 초록불인 횡단보도를 지나다 급정거하는 오토바이에 치일 뻔한 적이 있는데요. 다가오는 오토바이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오토바이가 코앞이더라고요. 그때 3초 남짓이 정말 느리게 흘러가더군요. 맨날 '이제 죽어도 좋다, 여기서 죽어도 좋다' 남발하더니 드디어 죽는구나. 그러니까 그런 말을 왜 꺼내가지고, 신이 있다면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지라고 질책하시는 건가. 오만가지의 생각을 하다가, 지금까지 회의주의에 젖어 즐겁게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삶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직까지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밖에 못 느껴봤는데, 이유 없는 불행처럼 다가올 수 있는, 이유 없는 행복에 대해서도 느껴보지 못하고 간다는 게 참 한스럽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의 주인공이면 참 좋겠습니다. 솔직히 이미 오랜 기간 숨 쉬듯 우울함을 느꼈던 저였기에, 그 일면의 순간이 저를 완전히 뒤바꾸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그러한 경험이 있고 난 후, 세이킬로스의 비문과 피터 비에리의 말이 엉겁결에 마주치는 그 순간에요. '아, 또 내가 그때 후회했던 삶을 살고 있구나' 하고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지금의 삶처럼 살다 간 최후의 비문에 “살아있는 동안, 슬퍼라 고통에 미쳐 날뛰어라"라고 적을 텐데, 그런 비문은 왠지 멋이 없어 제 몫이 아닌 것만 같았거든요. 삶의 끝에서 돌아볼 때 남들보다 일찍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의주의에 절여져 많은 기회를 포기해 온 시간들이 지나가요. 그러나 삶에는 이유 없는 불행이 있듯, 또 이유 없이 다가온 기쁨도 있었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차피 죽을 거 즐겁게 살다가 가는 게 더 논리적으로도 나은 생각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죠. 세상이 불공평한 걸 인정합니다. 모든 일은 불공평하게 일어난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고 다른 분들도 그런 순간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다가올 감정과 기회를 모두 부정하며 삶을 끝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원래 힘듭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잠겨 죽을 것만 같은 슬픔이 있는 날도 있습니다,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있는 날도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에게 좋은 일만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도 나쁜 사람에게 나쁜 일만 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요.

이유 없는 악이 있듯, 이유 없는 선 또한 있는 것이 인생이지요. 그렇게 이유 없이 나를 채워졌던 사랑을 떠올리며 삶을 견뎌내다 보면, 어느 날은 작은 햇볕 하나에도 이유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날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지도 않을까요?


내가 속한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내가 보는 세상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내가 속한 세상을 바꿔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과거 그저 "시크릿"으로 여겨지던 막연한 믿음이, 현대 와서는 자신이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자기 효능감"이라는 학문적 용어로 굳어진 것만 해도요.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수행 능력이 높아진다는 건, 이제 막연한 비밀이 아닌 검증 가능한 사회과학이 되었다는 걸 느껴요.


그러니 삶과 행복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평생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테지만, 믿는 사람은 삶과 행복을 알아가며 살아갈 확률이 그래도 높겠죠. 요리보고 저리 봐도 역시 삶을 안 믿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혹여나 그런 삶과 행복의 가능성을 느끼지 못하고 죽더라도, 이런 마음을 먹고 노력한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나의 비문은 더 잘 쓰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또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주기도 하니,  거, 뭐. 거하게 속는 셈 치고 믿어봅시다.


☁️ 삶울림Lifecho____

음악: 세이킬로스의 비문 = 삶: 끝에서 거꾸로 보기

ㅣ 삶의 아주 끝에서 태초의 끝을 바라보는 무수한 경험을 통하여, 끝끝내 최후로 말미암을 수많은 최초의 나를 위하여. 


- 추천 음반/ 연주 출처

 SAVAE, Song of Seikilos (World Library Publication, 2015)

https://www.youtube.com/watch?v=hIFcIE23Su4


- 세이킬로스 노래의 현대적 해석은,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 제7판(상)을 인용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