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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Oct 18. 2023

시작이 반이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주말에 커피 한 잔 어떻냐는 질문에 디디는 그렇게 대꾸했다. 무릎을 툭 치면 튀어나오는 정강이처럼 반사적인 대답의 이질감에 비비는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디디는 반박자 늦게 월요일에 있을 중요한 학회를 덧붙였다. 비비는 실소를 띠며, 이해한다며, 자신도 월요일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어놓았다. 비비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디디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채지는 못 했지만 비비가 꼰 다리가 내내 신경 쓰였다.


그날 저녁 디디는 강아지 죠지의 산책을 나갔다. 토요일은 햇살에 닿은 바닥면이 슬슬 노랗게 올라올 무렵 동네 카페로 나갔다. 이것저것 검색하고 답장하느라 커피 두 잔 마실 만큼의 시간을 쓰고, 세 번째 커피를 마실 동안 학회를 준비했다. 저녁은 논현동에서 친구들과 식사 약속이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자리에서 친구들은 디디를 신기하듯 쳐다봤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시간이 불편해서 만든 정기모임이었다. 디디는 단톡방에 존재하지만 현실 모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의 생존을 단톡방에서 최후의 1을 가져갔을 때와 이따금 그의 SNS에 올라오는 죠지 사진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바쁜 것 좀 지나갔어?"

"여전해. 월요일에 중요한 학회가 있어. 오늘도 겨우 나왔다."


친구1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는?"


친구1 옆 디디와 사선으로 앉은 친구2가 물었다. 원래부터 살집이 두둑했던 녀석이었나. 적당히 푸짐하게 오른 볼살을 보다가 입꼬리에 시선이 닿았다. 디디는 고개 숙여 답했다.


"안 한지 오래지."

"친구야 사랑해라. 시간 금방이다. 청춘 다 썩힐 거야? 꿈도 좋지만 그 나이 때 즐길 수 있는 건 지나면 끝이라구."

"연애 시작하는 방법을 까먹은 것 같아. 너희는 다 연애해?"

"헤어졌다 만나고 또 헤어졌다가 다른 사람 만나고. 다 똑같지 않겠냐."

"나는 다른데."


여태껏 말을 아끼던 디디 옆자리 친구3이 마침내 끼어들었다.


"연애를 쉰 지 오래됐어. 다가오는 사람들이야 있지. 만나볼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두가 안 나. 출발부터 마지막 노선을 밟기까지 단계들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져. 서로의 낯섦을 줄여가는 과정들. 필연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사랑, 다툼, 헤어짐. 그 잔인한 헤어짐."

"너는 6년 사귄 애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잖아. 마음 정리가 멀었나 봐."

"그럴지도. 나는 이제 사랑을 잘 알아. 그래서 만나지 못하겠어."

"연애가 두렵니?" 디디가 물었다.


"감정 소모하고 탈진한 상태의 나. 그때의 내 모습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 사랑은 나를 휘발시켜. 청춘을 썩힌다, 인정. 연애할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걸 더 할 수 있다, 아닌 거 인정. 어쩌면 너 말대로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디디는 아닐 텐데. 항상 바쁘니까."

"사람은 다 다르니까. 하지만 저 녀석도 365일 일만 하는 건 아니야. 목표치에 근사하기까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지. 내 말 맞아?"


디디가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시끌하던 이자카야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남자3은 곧바로 말을 잇길 주저했다. 말 많은 사내 셋의 정중한 호흡이 느껴지자 가을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듯 자신이 쏟은 말들의 무게가 느껴지며 앞뒤 연관을 잘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할 때의 나는 오히려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 같아. 이기적이지만 가끔은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 연인과 손을 잡는 나, 연인의 작고 연약한 귀에 사랑을 속삭이는 나, 연인을 끌어안고 몸 전체에 닿는 적당한 따듯함으로 행복에 젖은 나. 하지만 사랑을 하는 내 모습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다면.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정확히 같은 마음이야."


디디는 친구 3과 깊은 연결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과 비슷한 결을 가진 것 같아 특별히 정이 가던 아이였다. 떠들썩한 모임에서도 천천히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꺼낼 줄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동시에 친구 1, 2의 모든 행위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단체 모임보다는 친구 3과 더욱 각별히 지내야겠다고 디디는 생각했다.


디디는 엷게 썰린 무생채 위에 한 점 남은 투박하게 썰린 광어회를 보았다. 한때 몸 전체를 이룩하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고깃 조각이 되었다. 친구3이 말한 사랑론은 연인뿐 아니라 전체에 닿아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시시덕거리는 것도 어린 날의 특권일 뿐. 업계에서 자리를 잡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그에게서 휴식을 빼앗았다. 일이 있을 때에도 없을 때에도. 영화 "언컷젬스"의 보석상 하워드 제트너처럼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손뼉을 칠 때에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 지금 디디의 손은 접혀있다. 만남이 만든 탈진이 거듭되며 디디는 혼자서는 겁이 나 도저히 손을 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디디가 오늘 아침 반사적으로 말했던 시간이 없음 선언은 온전한 마음으로 타인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만남을 유보하겠다는 자기 방어였다. 신호 수신자는 발신자의 의도와 다르게 메시지를 오해한다. 이유는 대부분 자신 내면을 향해 있기에 비비는 디디의 입에서 후속으로 꺼내는 문장들만 기다렸을 것이다. 디디는 학회 핑계 외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음 만남을 서둘러 성사하고 싶은 비비의 마음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이다. 오래간 닫혀있던 마음이, 비비를 향한 강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못한다. 디디는 걱정했다. 비비가 만남의 유보를 관계의 종결로 받아들여 오늘 이후 아무런 연락이 안 오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카페에서 헤어진 이후 비비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있다고 믿는 상태에서 한쪽이 수동적인 태세를 보인다면 반대쪽 마음도 언제까지나 열고 있지는 못할 노릇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인연이 적지 않다.


일요일 저녁. 죠지와 산책을 마치고, 세면대 위 네 개의 발바닥을 모두 닦고 나서야 디디는 침대에 누웠다. 문자가 와있었다.


'내일이 학회네요. 잘 마치세요.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지 말고요.'


조금 어둑한 디디의 방은 고요했다. 죠지는 피곤했는지 제 집으로 마련된 폭신한 소파에 배를 내놓고 거꾸로 누워 디디에게 눈을 흘겼다. 답장을 관두고 디디는 자신의 사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전화음 몇 번 울리지 않고 사촌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본론이나 말하라며 보챘다.


"요새 연락하는 사람이 있어. 내 마음은 그 사람에 기울었어. 그런데 바빠. 연애로 진행하는 모든 일이 꼬일까 두려워. 바쁜데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바쁠수록 연애를 해야지."


어둑하고 축축한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씹는 시간은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 주어진다. 동굴 속 침잠하는 기간을 고독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충분한 시간을 보낸 뒤 하산하면 된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질 동굴이다. 한 번 동굴을 찾은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회귀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경계해야 할 것은 동굴의 존재가 아니라 동굴 탈출 시기다. 덜해도 과해도 문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론 벗어나야 한다. 디디가 사촌에게 뻗은 손은 동굴 탈출을 갈구하는 간곡한 바람에서 비롯된 행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전화를 끊고. 디디는 답장을 보냈다.


'다음 주 커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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