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동윤 Oct 18. 2023

비비와 디디

비비의 연락이 온 건 금요일 이른 저녁이었다. 디디는 월요일까지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쥐뜯는 중이었다. 직사각형 원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하얀 책상 옆에는 치와와 죠지가 제 주인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디디는 죠지의 익숙한 투정에 글쓰기 몰입을 도둑맞았고. 될 대로 되라는 둥 침대에 가 엎어졌다. 마감까지는 아직 이틀의 여유가 있었다. 육중한 하중을 받으려 이불속 공기가 빠지는 소리에 죠지가 벌떡 일어나 짖었다. 그의 입에 간식 하나 물리고나서야 디디는 누울 수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묵혀둔 연락을 확인했다. 형형색색 가지런한 UI를 가진 기업 카톡이 주를 이뤘고 간간이 다음 주 술 약속을 재촉하는 친구들의 개인 카톡이 보였다. 대학원 동기들 단톡방,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 단톡방, 모임으로 만난 동년배 작가들 단톡방. 또 누구 누구가 껴있는 단톡방. 붉은 숫자들이 가리키는 건 ‘300+‘. 피곤함이 몰려와 핸드폰을 멀리 던졌다. 핸드폰은 침대 밑단으로 날아가 제 몸만치 점프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른이 된 디디는 모든 면에 대처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연락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아이러니 속에서 디디는 철저히 자기만의 공간을 운용하며 지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면 죠지를 데리고 나가 산책시켰고, 외로움을 느낄 때면 혼자 영화나 전시를 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매달 모이는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거나 강의를 늘리면 됐고. 때아닌 소나기처럼 우울감이 찾아와 이마를 짓누를 때면 글을 쓰거나 운동을 나가면 해소가 됐다. 생활에는 모자람이 없었고 전업 작가를 꿈꾸는 그의 비전도 올곧게 순항 중이었다.


알람이 울렸다. 늘 같은 연락음인데 기시감이 돌았다. 죠지는 그르렁 소리를 옅게 내며 뒤집어 엎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침내 찾아온 평화. 디디는 선택을 해야 했다.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집어 서늘한 궁금증을 해소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잠을 청해 다음날 일과를 조금 일찍 시작할 것인가. 알람의 정체가 디디가 기다리는 사람이라 확신할 수 없다. 느닷없이 익숙한 친구의 별 것 아닌 물음일 때가 많은 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생각 많은 밤이면 차라리 생각 스위치를 꺼두고 잠을 자는 게 효율적이다. 마침 죠지도 잠을 자고, 오늘 분량의 4천 자 글쓰기를 마쳤고, 방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도 알맞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그런 날이 있다. 뻔히 예상되는 일상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쟁취하고 싶은 날. 보통스러움을 전복시키는 건 허를 찌르는 행동이다. 틀림없이 디디는 학생들에게 소설 작법을 가르칠 때면 주인공 부분에 열을 올렸다.


“주인공은 현재에 만족하면 안 돼요. 상황에 저항하고 실패하고 좌절해야 합니다. 일상의 울타리 안에 주인공을 가두지 마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선 특히.”


핸드폰을 집었다. 미리 보기 창에 낯선 이의 메시지가 보였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언젠가 같은 책을 짚었던 사람이에요. 우연히 그때 생각이 나서 구글 서핑을 하다 작가님을 찾아 반가움에 메시지 남겨봅니다. 항상 작가님 응원해요. 그날 추천해 주신 책.. 아까워 아직도 못 읽고 있지만요.‘


누구지. 디디는 SNS 속 이미지로 어렵지 않게 비비를 그려낼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을 3년 전 북페어에서 만났다. 대학생인 디디는 자신의 지명 교수님의 신간 홍보를 위해 출판사 부스에서 소일거리를 돕고 있었다. 교수님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의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처음으로 많은 인파 속에서 환심을 얻으려 몸부림치는 일을 맡은 디디는 자주 속이 메스꺼웠지만 얼굴에 티가 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머지않아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와 책에 대해 물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말은 자꾸 쌓여 일정한 패턴을 만들었다. 그 균일함 속으로 자신을 맡기면 몸이 편해질 걸 알았지만 디디는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가득 미소를 장착하고 교수님의 신간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흥미롭다는 듯 책을 만지작거렸지만 설명이 끝나면 눈을 멀리 두고 떠났다. 광대가 제 근육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쯤 교수님의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긴 행렬이 일제히 디디를 쳐다봤다. 교수님은 서둘러 오라는 듯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귀엣말로 화장실이 급하다며, 잠깐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녀의 얼굴은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술만 붉게 떠 있었고, 채 디디가 대답도 하기 전에 다리를 안으로 조이며 자리를 피했다. 디디는 방금 전까지 교수님이 앉아 있던 자리로 가앉았다. 넓은 엉덩이 면적으로 그녀의 긴 전투를 대변하는 듯 미지근한 열기가 올라왔다. 디디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 피곤이 쓰여 있는데도 사인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중심 잡는 다리가 억척스러웠다. 저마다 가슴팍에 책을 꼭 안고 길게 늘어진 모습을 보니 얼른 돌아가 중단했던 과제작 소설을 다시금 쓸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멀리서 교수님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디디는 서둘러 자리를 비켜줬고 방금 전보다 훨씬 해사한 얼굴로 교수님은 자신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디디는 원래 자신이 서 있었던, 교수님 신간이 가득 쌓인 곳에서 책을 펼쳐가며 사진을 찍는 여성을 발견했다.


“죄송하지만 내지 촬영은 불가해서요. 눈으로 확인 부탁드려요.“

”아, 미안해요. 몰랐어요.“ 여성은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런 요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 교수님 신간이에요. 지금 구매하시면 사인도 받으실 수 있어요.“ 하고 디디는 옆에 길게 늘어진 행렬을 가리켰다.


여성은 아, 하고 벌어진 입을 한 박자 늦게 다물었고 디디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피하며 웃었다.


“유명하신 분인가 봐요.”

“방송 나오시고 확실히 인기가 생겼죠. 물론 문학계에서는 예전부터 확실한 입지가 있으셨구요.“

“괜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이번 책이 그럼 몇 번째로 내신 책이에요?”

“다섯 번째요. 소설집 두 권과 에세이집 두 권. 그리고 이번 게 처음으로 발표하는 장편이에요.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했던 단편소설 “홈 스위트 홈”을 장편화시킨 거라 화제가 됐었죠.“ 디디는 최대한 기계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목소리를 눌렀다.

“뉴스로 봤어요. 그분이시구나.”

“저희 교수님이세요.”

“아.”


여성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혹시 교수님께서 내신 책들 중에 추천해 주실 만한 게 있나요? 김 작가님 책은 처음이라 입문용으로 추천하실 만한 책이요. 아까 보니까,” 여성이 마저 말을 이으려 할 때쯤,

“이 책 어떠세요?” 디디의 손이 여성이 먼저 짚은 책 위로 포개졌다. 디디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책을 들고 여성에게 건넸다.

“이 책은 신간이 아니라 사인은 받을 수 없어요.”


디디는 몇 번 연락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모든 면에서 자신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 느꼈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였다. 두 사람은 이틀 뒤 가로수길의 한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런 식의 만남은 처음이라 디디는 묘한 설렘과 함께 비비가 자신 생각만큼 멋진 여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식집 앞으로 지나가는 여성이 많았다. 비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디디는 걸어오는 여성과 눈이 조금이라도 마주치면 비비인 것 같아 인사를 할 채비를 하다가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일식집 옆 건물로 들어가 잠시 머물다 나왔을 때 거리는 한적했다. 멀리서 생각보다 키가 큰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디디는 단번에 그녀가 비비라고 자신했다.


두 사람은 함께 소바를 먹었다. 이야깃거리가 남아 디디가 찾은 칵테일바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럼에도 이야깃거리가 다 하지 않아 새벽까지 여는 이자카야를 찾아 오래 걸었다. 디디는 비비가 기대만큼의 여성은 아니라는 데 안도했다. 디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지 꾸며낸 듯한 발성도, 답답함이 전해지는 느릿한 음조도. 대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곤 머리를 푹 숙여 끄덕거리는 모습도 디디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문득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비비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확실한 그의 이상형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자카야 영업시간까지 모두 끝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는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렸고 디디는 성큼성큼 걸어가 우산을 사 들고 왔다. 비비는 우산이 있었지만 디디의 우산을 함께 썼다. 비비가 먼저 택시를 잡았고 디디는 비비를 보내고 택시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니 시큼하고 떫은 지린내가 디디의 코를 찔렀다. 현관문 앞에는 죠지가 무언가 잔뜩 바라는 눈망울로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디디는 죠지가 흘린 소변을 처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시켰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뒤에 나는 풀내음이 났다. 디디는 죠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무언가 잊은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전 02화 내가 믿어온 세계와 불안의 상관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