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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Oct 18. 2023

내가 믿어온 세계와 불안의 상관관계

어느 여름날 아침, 디디는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연애는 벌써 1년 전이었고—이별을 권한 것도 디디였다—삶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취준생의 서러움을 떨친 지 오래였다. 지난밤 꾼 꿈이 문제였을까. 당장 꿈을 복기하려 했으나 모래사장에 적어놓은 꿈 노트는 위태로웠다. 디디는 거품 섞인 파도로 짓뭉기는 하얀 모래톱 위를 기는 바다거북이었다. 축축한 바다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이곳으로 왜 기어 나왔는지 이유를 잊었다. 분명 스스로 선택한 외출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게 분명했으나 바다거북 이전의 서사가 기억나지 않는 바다거북 디디는 답답했다. 그의 뒤편으로는 마치 달팽이가 자신이 지나간 길을 점액질을 흩뿌린 것처럼, 어느 추상주의 미술작가가 목탄으로 커다란 캔버스 위에 나선의 곡선을 한 번도 떼지 않고 그은 것처럼. 바다거북의 무게만큼 페인 모래길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꿈을 소설로 써야겠다.”


디디는 노트북을 켰다. 하지만 어째선지 단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문예창작과를 나와 글쓰기에 삶을 투신한 지 10년. 백지 위에 떠 있는 마우스 커서가 깜박인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디디는 이대로 다시는 글을 쓸 수 없는 저주에 걸려버렸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이 엄습해 제 손 같지 않는 손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닫힐 때 쿵 소리가 났다. 놀란 강아지 죠지가 일어나 짖었다. 단발성으로 토해내는 죠지의 반복적인 울부짖음에 따라 디디의 심장도 뛰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믿는 디디가 있다. 디디는 자신의 잘난 모습보다 부족한 모습을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인생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냈을 때도 디디의 시선은 바깥으로 향했다. 그에게 세계는 거대한 알 껍데기였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로시카처럼, 하나의 껍데기를 깨부수면 다음 껍데기가 있고 그 껍데기를 깨부수면 더 단단한 다음 껍데기가 등장했다. 각각의 껍질 틈 사이에도 한 줄기 빛은 세어 들고 있어서, 디디가 알을 깼을 때 세계는 은빛 기쁨의 빛이 아닌 무채색의 검갈색 빛이 그를 둘러싼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왔다. 세계의 붕괴를 이루는 건 그 새어드는 빛의 명도의 차이였다. 그것은 게임이었다. 하나의 퀘스트를 끝내고 누군가 찾아와 건네는 부드러운 젤리 같은 보상을 입에 넣으면 그 세계 캐릭터처럼 레벨이 오르는 것 같은 묘한 도취감이 있었다.


디디는 무교였지만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 일생 전반을 알을 깨며 살아온 디디는, 자신이 까뒤집은 알껍질을 쌓는 습관이 있었다. 사냥꾼이 자신이 잡은 동물의 가죽을 모아 장식한다든가 곤충학자들이 채집통에서 벌레의 딱딱한 갑판 한가운데 침을 꽂아 보관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깨진 껍질은 디디가 속해있던 세계의 편린이었고 그것으로 디디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디디. 그는 자신이 걸어온 모든 행로에 미련이 없었다. 지나치게 낙천적인 태도가 뒷받침한다. 그를 둘러싼 모든 고난은 성장을 위한 계단이었고, 우연한 사고는 자신의 부족한 면모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디디가 한참 배우를 동경하며 아침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대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받고, 밤에는 연습실에서 대본을 연습했을 때. 고난은 인생의 짧은 구간에서 여러 번 몰아쳤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경험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아낌없이 나눠주길 자처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여전히 신비하게 쳐다보는 디디의 동그란 눈망울은, 그들이 보기에 좋은 멘티의 여건을 육각형으로 만족했다. 디디가 속하는 집단마다 스스로 멘토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새벽 6시 30분에 출근을 하면 1년 먼저 들어온 여자가 항상 먼저 와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디디는 주 7일 출근했고 여자는 주말만 일했다. 근무수당은 쳐주지 않지만 오픈하려면 어느 정도 일찍 와서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는 디디보다 2살이 많았고 항상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었다. 카페 문을 열고 CLOSED 팻말을 OPEN으로 돌리고 매장에 모든 불 켜고 커피를 몇 개 뽑아 균일한 맛을 맞추면 손님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디디와 함께 근무한 첫날부터 여자는 금방이라도 입 맞출 수 있을만한 거리에서 디디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에 궁금한 게 많았고 그것을 디디의 시선으로 해석하길 바랐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음성언어가 자신을 향했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디디의 표정 변화에 민감했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거듭된 음성인식 탓인지 디디가 하품이라도 했다간 그날은 일절 대화를 끊고 핸드폰만 했다. 디디는 눈앞에 보이는 부담이 보이지 않는 부담보다 낫다는 걸 배웠다. 여자는 인천에서 홀로 올라와 자취하며 조금 외로울 뿐이었다. 그녀 주변 남자들 얘기에 디디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눈을 맞추고, 위험할 정도로 여자가 다가왔을 때만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싱크대로 몸을 빼내어 설거지하는 지혜를 터득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평일 근무 때에도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 했다.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스스로를 형이라 부르길 자처하는 사장은 대부분 친근했지만 매장 곳곳에 달린 카메라를 종종 언급했다. 매장에 방문한 그는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뽑아 마시라며 직접 커피를 탈 때마다, 할 일은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덧붙였다. 형이 없을 때에도 카메라는 수시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디디는 형의 화살코를 쥐어박아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은 형이 원하는 건 큰 게 아니었다. 출근해서 밤 사이 내려앉는 먼지를 닦거나 손님들에게 미소를 띠며 스몰토크를 하면, 형은 어떻게 알았는지 커피를 탈 때마다 디디를 칭찬했다. 근속 일자가 반년이 넘어가자 카메라가 출입문을 향해 고정된 날들이 길어졌다. 디디는 그것으로 안정을 느꼈다.


기본 세팅이 끝나고 간이의자에 앉으면, 두 사람이 있는 매대 정면으로 보이는 통유리 건너로 새벽의 푸르름이 걷히는 게 보였다. 차가운 빛이 따뜻한 빛으로 전환되는 건 한 순간이다. 처음엔 아예 다른 장면처럼 디졸브 되듯 두 개의 화면이 겹쳐 보이지만, 몇 초 사이에 양면 색종이를 뒤집은 듯 전혀 다른 물성이 엄습한다. 디디는 아침이 주는 고요한 출발이 좋았다. 디디는 호기심 많은 여자가 있는 주말과 평일을 각각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한적한 동네 골목 카페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음유하는 건 평일, 인간관계를 훈련하고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대의 유혹으로부터 본능을 절제하는 건 주말. 같은 공간에서 첨예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상황에 적응하는 건 디디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복잡스런 시간들을 거치고 디디의 나이는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다. 디디는 학부시절 때부터 따르던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 석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저명한 소설가였고 스무 살 때부터 자신에게 헌신한 디디를 아들처럼 챙겼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디디는 어릴 때처럼 3개의 조각으로 쪼개지 않아도 됐다. 이제는 두 개의 조각, 오후까지는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교수님을 돕거나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며 돈을 벌었다. 저녁이 오면 창작의 시간이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강아지 죠지와 산책을 나가고 돌아와 자신의 숙명인양 다시 글을 쓰는. 10년의 시간 동안 글을 써오며 신춘문예나 문예지에서 괄목할 만한 수상을 거두진 못 했으나 어쨌건 꾸준히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선택받지는 못 했지만 그의 하드엔 수십 개의 기획안이 있고 몇 개의 소설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글을 팔아볼 엄두는 안 나지만 그에게는 좋은 멘토가 있다. 보수적인 문학과 매체를 뚫고 자신의 저변을 넓혀가는 교수님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디디를 안심시켰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기회가 왔을 때 따내는 건 오로지 스스로 해내야 한다고. 기회는 자신이 어떻게든 물어줄 테니 한 번에 따낼 수 있게 대비해 두라고. 디디는 자신이 무심코 이룩한 세계 안에서 큰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실은 어릴 적부터 디디가 그려온 삶이었다.


디디의 하루는 초등학생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려 시간마다 일정을 기록하는 하루 계획표와 같았다. 반복되는 삶에 권태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새로운 일은 항상 무료할 때쯤 터졌다. 새로운 연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문제가 생겨 메우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여행을 계획해 훌쩍 떠나기도 했다. 디디는 자신의 인생이 어떤 한 점으로 모일 거라는 데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이제 예측 불가능한 낯선 세계를 좇을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간 지나온 모든 기록이 한 점으로 모이길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 열심히 투쟁하며 살아왔고, 이제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나가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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