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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Oct 18. 2023

당신만을 위한 글을 씁니다 2

"연락이 며칠간 없길래 바쁜 줄 알았어요."


디디는 비비를 의심했다. 그녀는 웃음이 헤펐다. 당신과의 만남을 두고 한 고민의 시간을 정말 바빠서 그렇다고 믿었던 걸까. 나는 알고 있는 것을 상대가 모른다는 자책감으로 두 번째 만남의 장소로 샹들리에가 걸려있는 레스토랑을 골랐다. 바다거북 이야기에 이입된 탓인지 갈증이 심해 앉은 자리에서 연거푸 생수가 담긴 컵 두 잔을 들이켰는데 그때마다 가지런히 손을 모은 종업원이 주전자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퍽 불편했다. 피자와 뇨끼는 맛이 훌륭했다. 비비는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며 겪는 근무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상적인 너무나도 일상적인. 사내 정치 파벌과 윗사람들 사이 낀 아랫사람으로써 원치 않는 대화자리에 끼며 듣는 참견들. 디디는 비비가 괜찮은 여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쳤을 때 바깥은 여전히 밝았다. 두 사람은 함께 약속하지 않은 영화를 보러 갔다. 이미 본 영화였지만 디디는 처음 보는 척을 하며 한 번 더 봤다. 불이 꺼지고. 디디는 비비의 오른팔이 신경 쓰였다. 팔걸이가 좁아 이따금 웃긴 장면이 나올 때면 팔끼리 부딪치며 오묘한 기분을 줬다. 처음엔 화들짝 놀라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팔을 치웠고. 저도 모르게 다시 닿았을 때는 모른 척 닿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크레딧이 오르며 불이 환해질 때쯤 조용히 팔을 거뒀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요?"


로데오 거리를 두어 번 왕복하다 두 사람은 막차를 놓쳤다. 택시를 기다리며 다음 만남을 기약한 건 다름 아닌 디디였다. 질문을 듣는 비비의 눈동자에 빛이 모여 반짝 빛났다. 두 사람은 일주일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먼저 온 택시에 비비를 태워 보내고 디디는 로데오 거리를 한 바퀴 더 돌고 택시를 잡았다.


비비를 멀리해. 그녀도 결국 너를 다치게 만들 타인이다. 집에 와서 디디는 머리털을 구겨잡고 누웠다. 지난 사랑은 모두 상처를 안겼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건 수박을 나누는 것과 같다. 진녹색 배경 위를 멋지게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검은 줄무늬. 단단한 외피를 가졌음에도 단번에 입안에서 녹아버리는 껍질 안에 품은 붉은 과육을 상상하며 사람들은 사랑의 시작과 함께 서로에게 각자가 가진 수박을 건넨다. 수박의 크기가 크고 두들겼을 때 둔탁한 소리가 날수록 이곳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띤다. 디디의 수박은 멋스런 진녹색과 고개를 끄덕일만한 크기를 갖고 있었다. 인생의 초년기를 보내며 디디의 맘에 꼭 드는 수박을 건넨 여자와 만나 서로의 수박을 교환했고. 서로의 가장 연약한 과육을 씹으며 사랑을 나눴다. 사랑은 과육의 유한함을 가리켰다. 암만 큰 수박을 갖고 있다 한들 그것만의 매력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졌고, 과육의 당도가 높다 한들 새 살이 차오르는 것보다 가진 살이 닳는 속도가 더 빨랐다. 관계의 끝에 상대는 언제나 수박을 돌려받길 원했다. 디디에게 건네준 자신의 수박이든, 디디가 준 수박의 원래 모양이든 디디는 요구대로 돌려줄 수박이 없었다. 각자가 떠난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연애가 끝난 뒤 디디의 손에는 전보다 색 바랜 수박이 들려 있었다.


작은 앞발로 무릎을 밟아대는 죠지에게 간식을 물려주고 디디는 책상에 앉았다. 오늘 만남이 즐거웠다고 비비의 카톡이 와있었다. 디디는 당장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때문에 비비의 카톡에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기다릴게 분명했지만 위험한 저녁에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디디는 생각을 않으려 노트북을 켜고 자신의 원고로 돌아갔다. 타자판을 두들길 때면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잡생각이 한데 모여 정갈한 언어의 형태를 띤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디는 자신의 손으로 빚은 길게 늘어진 흑색의 문자열이 좋았고, 어느 순간 여러 층을 두고 쌓인 텍스트 박스들을 볼 때면 묘한 희열에 취할 것만 같았다.


바다거북은 보라색과 파란색의 중간 지점 해류에 둥둥 떠다니는 형체를 목격했다. 물리적인 거리상 요원하지만 바다거북 눈에는 그것이 너무나 명확히 들어왔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이따금 햇살이 침범할 수 있는 곳까지 금을 긋고 들어와 은백색 평면으로 빛낼 때를 제외하고는 몇몇 물고기 외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던 바다였다. 실눈을 떠도 자세한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어 언젠가 수면 위에 떠다니던 수박껍데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거북은 그것 가까이 다가가 제 눈으로 확인하고픈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지느러미를 재촉했다. 가까워질수록 자신과 비슷한 껍데기가 가진 특유의 성질이 느껴졌다. 동종의 친밀감이 주는 유대에 반가웠지만 세포부터 다름을 경고하며 자꾸만 다가가는 속력을 늦췄다. 손만 뻗으면 자신과 똑 닮은 껍데기에 닿을 때쯤 목구멍으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바다거북은 육지거북을 만났다. 육지거북은 뭍 근처 낮은 파도를 타고 수영을 하다 갑자기 날아든 태풍에 이곳까지 휩쓸렸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는 내내 무해한 웃음을 흘렸는데 바다거북은 그 미소가 미웠다. 어릴 적 육지에서 탈출한 그의 최초의 기억 중 일부가 육지라는 단어에 이유 없는 경고를 더했다. 언젠가 주황색 해초로 뒤덮인 바다마을에서 교제하던 입이 큰 바다거북이 귀띔해준 말이 떠올랐다. 육지거북들은 날 때부터 안전한 건초더미에서 태어난다고.


“다리로 기는 것들은 뭍에서 생존을 위해 지느러미로 기는 이들의 아픔을 이해 못 하지. 언젠가 봤던 육지거북들은 마약 한 듯이 느리고 행복한 미소만 짓고 있었어. 육지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을 비유할 때 거북이라고 한대. 거북 망신 다 시키는 거 아니니?”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단번에 불식해 버릴 정도로 그 시간이 소중했다. 처음 느껴보는 욕망의 기운이었다. 바다거북은 점점 더 육지거북과 시간을 보내길 바랐고 육지거북의 일상을 알고 싶었다. 이따금 짓는 육지거북의 느긋한 미소가 좋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은 바다거북이 긴 시간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하나씩 바깥으로 꺼내 전시해 주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때의 느낌은 환각 성분을 가진 고기, 살레마 포기를 씹는 것과 같았다. 언제 어디라도 바다거북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육지거북이 없는 공간에서 둥둥 떠다닐 때도, 푸른빛 낯선 물고기들이 노다니는 걸 멍하니 쫓을 때도, 이따금 혼자 해수면에 올라 일광욕을 할 때도. 머릿속에 뿌리를 낸 해초가 나풀거리는 것처럼 간지러운 촉감이 들었다. 정맥 주사를 놓은 것처럼 매 순간 마음은 들끓었고 행복에 대한 소유욕은 점점 더 커져만 같다.


언젠가부터 검붉은 암초가 해수면과 닿은 집 앞에는 매일 아침 붉고, 연초록 빛깔의 어린 해초더미가 놓여있었다. 감히 도망칠 생각 않고 해초 더미에 몸을 숨긴 작은 새우와 새끼 게들이 별미였다. 육지거북은 해초를 뜯으며 매일 아침을 시작했고, 머지않아 바다 저 아래부터 바다거북의 등딱지가 보이면 힘껏 소리쳐 고마움을 표시했다. 바다거북은 자신의 노동에 대가와 에너지를 바라지 않았다. 육지거북을 멀리 해야겠다는 위험 신호가 여전히 불현듯 울렸으나 이제 육지거북 없는 아침을 보낼 수 없게, 깊이 잠식되어 버렸다. 낯선 바다 철창 안에 스스로를 밖에서부터 걸어 잠가 가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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