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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Oct 18. 2023

썸이 연애가 되기까지

디디가 비비에게 고백을 망설인 데는 보다 심오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닿은 출연 제의는 단순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에 큰 인기를 끈 소개팅 프로그램은 출연만으로 막대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시즌 4까지 오며 역대 출연자들의 행로가 그랬다. 그는 평소 자신의 꿈이 검은색 날벌레처럼 자꾸만 눈앞을 어른거려 허공에 손을 휘젓곤 했다. 선배들과 비교했을 때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쌓아야 누릴 수 있어 보였던 창작만 하는 삶이 연락 한 통으로 결정된다. 신경증적으로 날아다니는 저 날벌레를 당장이라도 두 손으로 합장해 터뜨릴 수 있다. 디디는 갑자기 손안에 작은 벌레의 끈끈한 사체가 느껴지는 듯한 촉감을 느꼈다. 착각은 디디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럼 비비는.


마음의 문을 먼저 연 건 분명 비비다. 하지만 고민 끝에 늦게나마 디디도 문을 열고 발을 디뎠다. 세상 속에서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서로를 인지도 못 하던 그들에게 사적인 공간이 생겼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사람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공간은 좀처럼 쉽게 생성될 수 없다. 어쩌면 마법의 기운이 얇은 천처럼 외부를 두르고 있어 보인다.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한데 모여 단 한순간 발현됐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두 사람을 위한 공간. 있다한들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어렵고 두 사람 모두 공간 안에 머물기를 결정하는 건 더 어렵지만, 디디의 경우처럼 상대방이 먼저 문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것 또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디디는 아직 문지방 위에 중간쯤 몸통을 두고 애매한 자세로 진입을 멈췄다. 실내에 있는 비비는 자신에게 굽은 디디의 상체에 온 신경이 쏠려 그의 하체가 취한 어중간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디디는 두 사람 관계의 키가 제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디디는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이 평생을 고유하게 지켜온. 무언가를 잃을 것 같다는 압박감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소개팅 프로그램에 나가도 사랑은 찾을 수 있다. 다만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게 디디를 힘들게 한다. 관계에 진심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중적인 잣대로 사랑을 재는 태도가 디디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단 한 번의 결정이, 디디를 앞으로도 그런 사람으로 만들 것만 같았다.


사전미팅이 있었다. 디디는 처음으로 방송국 건물 미팅실에 들어가 보았다. 낯선 곳에 적응하며 드는 기시감으로 디디는 손톱을 뜯었다. 자신을 피디라 소개하는 사람이 밝게 인사했다. 카메라를 들고 따라 들어온 남자가 자신은 작가라며 명함을 건넸다. 디디는 그들의 질문세례에 밝게 응수했다.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디디의 말이 끝나면 아 그렇군요, 하는 화답과 함께 키보드를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화의 한 뭉텅이가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규칙적인 적막에 디디는 조금씩 제 목을 스스로 조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피디의 노트북 옆에는 작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답변이 끝나면 사람의 눈처럼 보이는 가운뎃 구멍을 쳐다봤다. 디디는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저희 측에서 먼저 연락드릴게요. 이 주 정도는 기다려주세요. 편성이 늦어져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디디 씨를 염두하고 있어요”


디디가 비비에 했던 말이다. 순간 디디는 자신이 순수하게 믿어 의심치 않던 가치가 실은 먹이사슬 안에 놓인 선택적 가치라고 느꼈다. 의견을 보류하는 건 상대에 대한 의견 유보를 의미하고.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면서도 비비는 디디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디디는 문 안에 서 있을 비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전처럼 쉽게 그녀의 안부를 물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어렵게 한 자리를 차지한 행복의 공간이 벌레 먹은 잎처럼 패배감에 좀먹어 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닥닥 떨리는 이, 바닥으로 조아린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같은 얼굴을 가진 그들. 키도 체형도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다. 내 몸집을 작게 만드는 그것들은 실은 타인이 아닌 모두 나 자신이었던 것일까. 우울에 익사하기 직전 희미하게 마왕의 간사한 음성이 들려왔고 어둑한 밤 숲 속에 난 작은 오솔길로 장면이 전환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람을 가르며 말을 모는 아빠. 아빠의 등을 꽉 안은 어린아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이를 꾀어내려는 마왕의 목소리는 물류 직원이 익숙하게 택배 박스를 접듯 담담했고 아이는 아빠 몸통을 크게 감은 두 팔을 세게 쥐었다.


“아빠, 아빠,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내게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아이가 말했다.

“진정하거라 아가야. 걱정 말아라. 단지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란다.”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아빠의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왕은 거대한 두 손가락으로 아이의 영혼을 억지로 집어 채갔다. 아빠의 몸통에는 나무에 달라붙은 굼벵이 허물처럼 껍데기뿐인 아이의 몸통이 달려있다. 아이의 신호를 받은 아빠는 공포에 질려 말을 더 빨리 몰아댔다. 이윽고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랑하는 아이는 이미 품 속에서 죽어 있었다.


문학을 선택하기 전 디디는 직업배우였다. 다방면으로 익혀야 하는 직업 특성상 여럿 취미의 편력을 거쳤는데 연기적 발성훈련을 위해 한참을 성악 레슨을 받은 적이 있었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은 동명의 괴테의 시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디디는 “마왕”을 생전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바리톤 선생님의 추천으로 몇 개 남지 않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흑백 영상을 접했다. 해설, 아이, 아빠, 마왕. 4인을 연기해야 하는 고난도에 속하는 곡이었는데 캐릭터마다 몰입한 듯 싹 바뀌는 표정에 디디는 오감이 서늘했다. 디디는 그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독일 곡을 하기에 아직 한참 모자라다며 선생님은 이탈리아 가곡 “Ah! mio cor(헨델 오페라 Alcina의 아리아, 내 마음이여)” 나 “Ombra mai fu(헨델 오페라 Serse의 아리아, 어디에도 없던 소중한 나무그늘이여)“ 연습으로 두 달을 보냈다. 다음은 독일 가곡이겠지. 이탈리아 곡을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가방에 넣어둔 미리 인쇄한 악보를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완강했다. 된소리 발성부터 확보되고 나서야 독일어로 넘어가는 게 좋다며 다음 곡으로 “O del mio dolce ardor(글룩 오페라 Paride ed Elena의 아리아, 오 나의 감미로운 사랑이여)를 짚었다. 크게 좌절한 스물다섯의 디디는 어린 혈기로 슈베르트의 가곡을 독학했다. 선생님의 혜안은 틀림없었고 디디가 내는 소리는 돼지가 꿱꿱거리는 것과 진배없지만. 이탈리아 곡을 두 개 정도 더 한 뒤 레슨을 마쳤으니, 얻은 게 더 많은 셈이다.


어두운 밤 뭔가에 쫓기듯 자신의 허리춤을 두른 아이의 팔을 꽉 쥐고 말을 모는 아빠. 어딘가 목소리가 들린다며 괴로워하는 아이. 몰래 아이의 영혼에 접근하여 단 목소리로 꾀어내는 마왕. 엄숙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는 해설자. 수차례 울부짖는 아이를 달래며 돌아온 아빠가 발견한 건 싸늘하게 굳은 아이의 시체. 아이는 수차례 경고했다. 성난 말을 멈춰 세우고 아이를 돌아봐줬더라면 이야기의 결말은 달랐을까. 아빠는 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서둘러 집에 도착하는 게 모두의 안위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서는, 한 가지 목적이 모든 생각을 붙잡고 놔주질 않아, 사소한 일로 비롯해 소중한 것을 잃을 때가 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이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디디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의 작은 방에 책상을 빼고 앉아 긴 시간을 보냈다. 미팅했던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을 찾아 틀었다.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남녀들. 미팅 때 피디에게 지은 자신의 미소와 닮아 보였다. 디디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비비와의 카톡방 맨 위 대화부터 차례로 읽어 내렸다. 디디의 몸통이 문지방을 넘어 완전히 실내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몰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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