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함께 책을 골랐다. 언제나처럼 서점은 지적 허기를 채우려는 사람들과 인생에 환기를 일으키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디디는 비비의 인생책을 물었다. 상대를 간파하고 싶은 마음이 숨겨진 질문. 마음에 와닿는 책에는 그 자신이 품은 인생관 혹은 삶의 어느 한순간에 감응됐던 주인공이 있으니 말이다. 인생 영화를 묻는 것도 마찬가지. 당신의 인생 책과 영화는 무엇입니까, 그 속에 가려진 진심은.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토로하는 것이다.
비비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골랐다. 디디는 그것을 아직 읽지 못했기에 외워뒀다가 서둘러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비 역시 디디의 인생 책을 물었고 그는 거리낌 없이 데니얼 J. 레비틴의 “정리하는 뇌”를 골랐다. 디디는 흥분을 억누르며 뇌과학에 관심이 많아 크게 도움을 받은 책이라 덧붙였다. 비비는 비문학이 아닌 책 중에 얘기해 달라 재차 물었고, 디디는 웃음을 거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김애란의 단편소설집을 꺼내 집었다. 비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기에, 그녀의 문장을 닮고싶어서, 라는 직업병적인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각자의 인생 책이 어떤 표지를 갖는지 확인하려 두 사람은 교보문고 이곳저곳을 누볐다. 인파 때문인지 서로를 이끄는 강력한 자기장 탓이었는지. 손만 잡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의 거리는 좁았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이었다. 디디는 처음으로 데이트에 차를 몰고 와 조금은 우쭐한 마음이었지만 영화관은 언덕 위에 있었고 주차장이 없어 꽤나 긴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만 했다. 살을 에는 추위로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언제 났는지도 모르는 눈물이 또 언제 얼었는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찍찍이가 붙은 듯 끈적거렸고, 디디는 비비에게 그 모습을 들키기 싫어 머리를 더 높게 쳐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미리 찾아둔 식당이 한마디 일갈도 없이 문을 닫았다. 비비에게 조금 더 진심을 보이기로 결심한 디디가 벼르던 양식 레스토랑이다. 식당을 향할 때만 해도 잠깐의 추위쯤이야, 하고 자신했던 두 사람은 추위와 절망감을 표정관리하려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주택가 한복판에 있었을 식당은 건물 자체가 철거돼 황량한 공터로 내부의 바닥을 겉으로 해부시켜 놓은 것 같았다. 따듯한 식당에서 트러플이 들어간 값비싼 요리로 서로의 기분이 적당히 달궈진 때에 자신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 했던 계획은 이제 없다. 가로등 없는 까만 어둠이 두 사람을 덮쳤다.
“근처에 아무 데나 들어갈까요? 어제 보니깐 저쪽에 식당가가 있었거든요.”
비비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몸을 감싸던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디디도 전날 확인한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디디가 제외시킨 곳이었다. 길 따라 쭉 내려가면 세 번째 만남의 장소로 괜찮을까, 머뭇거리게 만드는 중저가의 프랜차이즈 타코 가게와 가정식 백반집이 있다. 속상했지만 비비의 코가 빨갛다. 디디는 비비의 말대로 걸음을 돌렸다. 식당가가 몰린 골목으로 가는 길은 반대편이었고 정확히 온 길만큼을 더 걸어야 했다. 비비는 이처럼 추운 날 식당을 찾아 횡보하는 서로의 처지를 비유하는 농담을 제안했다. 디디는 눈 내리는 겨울날, 이웃 민족의 침략으로 동굴을 빼앗기고 가족과 함께 새 동굴을 찾아 떠나는 네안데르탈인을 말했고. 비비는 대홍수가 있던 날 방주를 타고 최초의 대륙을 찾는 노아와 그의 아내를 말했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도 웃고 있는 자신이 디디는 신기했다.
가정식 백반집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함께 나온 나물은 싱싱했고 두 사람은 이누이트족처럼 붉어진 서로의 볼을 볼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몸에 조금씩 열이 돌기 시작했다. 비비가 겉옷을 벗어 옆자리에 두었다. 그녀는 제법 포근해 보이는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마주 앉은자리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침 물을 마시고 회수하기를 미처 까먹은 듯 비비의 손이 컵 옆에 놓여 있었다. 디디는 당장에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채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언덕 위에 있는 영화관까지는 적어도 10분은 걸어야 했다. 이미 영화관을 찍고 내려온 탓에 손 하나를 번갈아 꺼내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디디는 목도리를 풀러 비비의 목에 둘러주었다. 비비는 숨을 크게 내뱉을 뿐 사양하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숨을 까딱 잘못 쉬었다간 폐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전신에 닿았다. 비비의 가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내부의 식당으로 펄럭였다. 그들은 애매한 웃음을 띠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정면에 보이는 언덕으로 오르려면 넓게 난 골목을 따라 쭉 걸어가 왼쪽으로 틀어야 했다. 추위 탓인지, 도시 외곽에 있는 산을 따라 만든 주택가라 그런지 주변은 고요했다. 들리는 건 오직 두 사람이 내는 숨소리뿐이다. 디디가 숨을 뱉고 내쉴 때 비비가 숨을 뱉었고, 디디가 코를 훌쩍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비가 코를 훌쩍였다. 디디는 비비가 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닫는 데는 적잖은 망설임이 필요했다. 지금 디디는 영화 따위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결단이다. 교수님께서 어렵사리 구해준 방송 출연 기회는 관계의 정의와 함께 소멸된다. 출연권의 무게는 상당하다. 솔직한 디디 그대로 보여주고 오면 화제성 높은 방송에서 인기를 거머쥘 수 있었고 디디는 내는 책마다 어렵지 않게 적당한 판매부수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 때까지 별다른 고민 않고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다. 또한 자꾸 간과하는데 사랑은 그곳에서도 찾을 수도 있었다. 영원한 사랑을 믿을 나이는 애저녁에 지났다. 불꽃 튀기는 사랑부터 배신까지, 디디도 나름 연애 경력을 쌓아가며 살아왔다. 옆에 있는 비비와 지금은 스파크가 튀기지만 그것이 불변할 거라 믿는 피터팬이 아니다. 그럼 뭘 망설이는가. 디디의 생애를 통틀어 찾아온 가장 큰 기회를 무엇을 위해 고민하는가.
결국 통하는 건 진심이니까.
눈앞에 찾아온 사랑에 디디는 자꾸만 합리화를 한다. 그것은 양날의 검이다. 프로그램 기획상 새로운 사랑을 찾는 청춘남녀가 참가해야 한다. 디디의 사랑은 옆자리에 있다. 이미 사랑을 찾았다. 따라서 프로그램 출연자로서 디디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대중에 통하는 것은 결국 진심이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랑을 외면했다간 어쭙잖은 기대로 마음만 괴로울 것이다. 주변에서 사랑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소개팅, 심지어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찾았지 않는가. 문답이 거듭될수록 디디의 호흡은 가빠졌고, 비비는 바람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디디는 순간 비비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을 인식했다. 두 사람의 손은 코트 깊숙이 들어가 숨었지만 오가며 팔이 부자연스럽게 부딪쳤다. 마찰될 때 닿는 건 코트의 두꺼운 외피였지만 디디는 비비의 살갗을 느낄 수 있었다. 디디는 더 이상 선택을 유보할 수 없었다. 디디가 두툼한 오른손을 꺼내 비비의 코트 왼쪽 주머니로 들이밀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맞잡았다. 외부 온도 탓인지 살갗은 시원했고 디디의 손바닥 안에 여성의 손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놀란 복어처럼 그것은 순간 크기를 팽창시켰다가 이내 디디의 손에 알맞은 크기로 움츠려 들어 디디는 마치 살아있는 다른 동물을 움켜쥔 것으로 착각했다. 비비는 잠깐 걸음을 멈췄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앞장서 걸었다. 느린 발걸음이었다.
“우리 사귈까?”
두 사람은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쉰 명도 채 수용하지 못할 것 같은 작은 영화관에는 그들 말고도 네 팀 정도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영화는 영화대로 두 사람은 두 사람대로 시간이 흘렀다. 맞잡은 두 손은 두 시간이 넘는 영화 상영시간 내내 쉼 없이 움직였다. 영화가 끝날 때쯤 디디는 손으로 전해진 촉감만으로 그녀의 손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애는 가끔 논리로 설명되지 않을 만큼 경이로움을 선사하는데 서로의 장벽을 허무는데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그토록 어려워했던 두 사람이 연인을 선언하는 어떤 말이나 행위 후에는 상대가 마치 자신의 분신인양 자유롭게 침범한다. 선언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생각이 그들을 괴롭히는데 후에는 별 것 아닌 걸 왜 그렇게도 미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마음의 무게는 상대의 체온으로 단숨에 휘발된다. 구정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냇가에 던지는 것과 같다. 결정의 순간 떨어지는 항아리에서 구정물이 쏟아진다. 이윽고 강물의 유속에 항아리가 합류했을 때 그것은 둥근 곡면으로 빙글빙글 돌며 새로운 물을 들이켠다. 디디는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디디만큼이나 비비도 사랑에 빠졌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떨리는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디디를 잘 쳐다보지도 못한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빠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은 두 남녀는, 마지막 관람객이 빠지자마자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을 물었다. 머리카락 수어 개를 동시에 뽑은, 아니 그것보다 몇 백 배는 강력한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분출돼 그들을 유영하게 했고 디디는 자신의 볼에 살포시 닿은 비비의 손이 좋았다.
두 사람은 하룻밤 사이 연인이 됐다. 다음날이면 각자 수습할 일더미가 있겠지만 당장은 그 어떤 요소라도 그들의 기쁨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디디는 자신 핸드폰에 비비를 비비로 등록할 수 있어 좋았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보러 달려가고 싶었고 그만큼의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하길 바랐고 비비 역시 그랬다. 그들은 매우 닮아 있었다. 시작부터 그랬다. 우리는 디디가 일과 사랑 사이 진심이 가는 쪽을 택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비비는 처음부터 디디에게 진심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일상은 뜀뛰기를 하는 듯 들썩였고 디디의 창작에도 탄력이 생겼다. 도저히 끼워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스케줄에도 공간은 있었다. 두 사람은 바쁜 일상을 살았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견뎠고 한 주의 끝에는 만남으로 보상을 줬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서로는 서로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행복은 행복을 물고 온다. 웃는 이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틀림없는 명제다.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연락이 왔다. 디디의 습작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문자였다. 자신을 제작사 대표로 소개한 그는 디디가 비비를 처음 만난 북페어 때부터 종종 안부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디디는 이 사실을 비비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좀 더 명확해질 때까지 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