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지나가는 섬광이었다. 당신은 나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다독이고 끌어안고 헤어져달라 절규했어도 결국 내 눈물을 닦아준 사람. 잦았던 앞전의 이별과 달리 너와의 진짜 마지막이 왔음을, 피부에 붉게 돋은 알러지로 직감할 수 있었다. 잠깐 거리 두기가 아닌 영원한 맺음. 가라앉은 너의 눈에 담긴 나는 그 여름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너는 나의 전 연인이 되었다. 익숙한 연인이란 문자 앞에 붙은 단어가 기억력을 감퇴시키는 듯하다. 단 꿀 같은 해방감에 취해 보낸 시간이 너와 사귄 첫 나날들처럼 빠르게 흘렀다. 이제 함께 식사한 레스토랑에 가도 네가 떠오르지 않는다. 너란 사람에 고슴도치 가시처럼 바짝 선 오감 신경세포는 가루 분자 형태로 흩뿌려져 무중력 공간에 떠다닌다. 그 무렵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의 애도기간을 갖는 동안 분명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 선언을 했다. 내게는 변명거리가 있다. 사랑은 늘 나의 공간으로 갑자기 침범한다. 사랑이니까. 아직은 너무 낯선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건강하게 너를 지운다.
그 사람은 분명 너와 다른 사람이지만 친구들은 그 사람과 너의 닮은 구석을 말한다. 심술이라 어물쩡 넘겼지만 주저앉은 밤에는 그때 찾은 기억의 조각으로 너를 떠올린다. 지나간 사랑은 조각난 파편에 대신 새겨진다. 다신 볼 수 없는 나의 오랜 친구를 떠올리는 밤. 먹을 엷게 펴 바른 화선지 위로 쨍한 하얀색 파편들을 모아 불꽃놀이를 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현듯 켜지는 기억이 있다. 짙은 사랑의 순간들을 상영하는 영화관에서는. 강렬한 행복 혹은 그와 대척점에 선 불행을 찍은 필름뭉치가 상시 상영한다. 아무런 사건도 갈등도 없는, 찍는 사람만 즐거운 어느 독립영화처럼. 뒤엉킨 필름뭉치를 끊어 영사기에 오려 붙이면 옛 영화에서나 볼 법한 회색 알갱이들이 자글거리는 필름 화면이 끊겼다 보이길 반복하며 거북이 눈 꿈뻑이듯 영상이 재생되는데. 저주하던 모습도 가슴 찢어지는 모습도 모두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추억에 침잠한 밤이면 그 조각을 모아 만든 영화를 시청하며 나는 그것을 잊는다. 애틋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서로를 겪으며 성숙하게 익은 사랑을 지금 내 곁의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 일상 같지 않은 기이한 전조에 나는 서늘했다.
“잘 지내?“
너의 문자를 답신 않고 넘겼다. 물리적으로 맞닿은 너의 재방문은 나를 찝찝하게 만든다.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연락하는 너에게 연민을 느낀다. 늦은 저녁. 우리를 거쳐간 전 연인들은 언제나 어둠이 내려서야 안부를 묻는다. 불쑥 침범한 낯익은 자의 방문을 잊으려 무거운 몸을 굳이 일으켜 설거짓거리를 해치우고, 속옷을 갠다. 제쳐둔 할 일도 막상 처리하다 보면 별 것 없다. 의자에 경건하게 가앉는다. 답장은 않겠지만 인사받지 않을 미운 마음으로 너의 소식을 쫓는다. 인스타 속 너는 기억과 같은 모습. 낯섦은 오히려 모래사장 위 빗금을 긋는 듯 머리가 만든 것. 나는 추적을 그만둔다. 그리고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 현 연인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어젯밤 전 연인한테 연락이 왔어.“
”그래서? 이야기했어? “
순간이었지만 연인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리고 돌발적인 신체반응을 무위로 돌리려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괜한 말을 했구나 자책했다.
“받지 않고 무시했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 다른 사람이랑 잘 만났으면 하는 마음은 있는데, 괜히 마음 쓰고 싶지 않았어.”
“그만. 거기까지 들으면 됐어.”
“미안.“
“아니야 얘기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 생기면 말해줘. 사랑해.“
“나도 사랑해.”
연인은 묵묵히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가 아니다. 이따금 나는 연인의 다정함에 취해 하나의 역할을 추가로 부여한다. 어릴 때야 세상의 축이 나로 시작한다는 착각으로 실수도 잦았지만 이제는 나의 편안함이 상대의 배려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안부 인사를 고백한 죄명으로 나는 우리의 관계에 작은 위협이라도 가할 수 있는 전 연인이 미웠다.
돌아오는 저녁이 우리의 진짜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의 특기를 발휘하기로 했다. 연필을 들고 깨끗한 종이를 여러 장 준비한 나는 창조주가 되어 너와 꼭 닮은 캐릭터를 빚었다. 가상의 태에 너를 입혀 나를 다시 찾은 이유에 대해 질문했다. 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큰 눈을 꿈벅이며 말했다.
“오해마. 그냥 연락해 봤어. 그래, 그대로네. 그냥이라는 말은 없다고 단언했던 네가 생각나. 하지만 그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있더라. 이를테면 이죽거리는 손톱을 물어뜯거나 집에 들어오면 온 방안의 불을 켜두는 반복적인 행위들. 달리기 전에 크게 입 벌려 숨을 들이켜듯 일상으로 굳어진 습관 따위가 말야. 그냥 네 생각이 났어. 너와 다시 만나볼까 하는 마음으로 연락하지 않았어. 새로 만든 세계를 공들여 지켰을 너에게 혼란을 줬다면 미안해. 나 역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있어. 거른 끼니는 없는지, 잠은 잘 잤는지를 걱정해 주는 다정한 사람이야. 우리는 안정됐어. 서로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배려하고 자주 보듬어주려 해. 가끔 다투고 가끔 밉지만. 파도는 곧 잠잠해지리라는 걸, 우리는 알잖아. 고백할게. 가끔은 너와의 연애로 대입해 새로운 우리를 생각해.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은 순간들, 한 발짝 뒤로 빼고 싶은 순간들에 기준이 되어준 너에게 고마워. 가끔은 그 모든 순간이 허무하더라. 부끄럽고 어리석은 순간들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 그런가 봐. 충실하게 사랑하자 우리. 현재의 연인들을 우리로 미루어 더한 사랑을 표현하자.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순간에 충실하는 것뿐이니까. 연인의 전애인을 사랑했냐는 질문에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만 눈치 없는 솔직함을 지키려 해. 많이 미워했고 사랑했어 많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 너의 모든 앞길이 금빛 축제들로 가득하길 바라. 안녕.“
또 한 번 너를 지우고. 사랑하는 지금의 연인에게 전화해 긴 시간 통화를 했고 사랑해, 표현하고 잠에 들었다. 답신 않을 문자는 삭제했다. 너무 차가운 곳에 데여도 화상을 입지만, 너의 뜨거운 용기는 상처 없이 또 다른 사랑에 무사히 안착하리라 확신하며. 이제 정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