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스탄의 감각

by traveLife

인도 편을 쓰다 보니 자꾸 묵직하게 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좀더 화사한 곳으로 이동해볼까 한다. 아그라와 자이푸르 편에서 잠시 언급했던 '핑크 시티'를 기억하시는지. 그 분홍빛 향연의 도시 자이푸르가 있는 라자스탄(Rajasthan) 주는 인도의 북서쪽 끝에서 거대한 사막 지대와 맞물려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해왔다. 그곳의 부족장들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웅장한 성을 지었고, 시내 중심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사막의 메마른 색과 대조되는 화려한 색상의 염색과 자수 문화가 발달하여 보는 재미를 한껏 가미시켜준다.

map-india2rajasthan.png

자이푸르가 '핑크 시티'라 불리는 것처럼 라자스탄 주의 다른 도시들도 컬러풀한 별칭을 갖고 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영화 <김종욱 찾기>로 유명해진 '블루 시티' 조드푸르(Jodhpur)도 있고, 타르 사막의 빛깔을 그대로 담아낸 '골든 시티' 자이살메르(Jaisalmer)도 있으며, 허니문 여행지로 유명한 '화이트 시티' 우다이푸르(Udaipur)도 있다.


북쪽에서 내려오던 나는 이 컬러풀한 도시들로 진입하기 전에 먼저 비카네르(Bikaner)라는 곳을 경유하게 되었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시내 중심에는 멋진 성도 있고, 라자스탄 최대 규모의 커다란 시장도 있었으며, 거리에는 소 대신 낙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모사(감자 커리 튀김)를 사먹는 순간, 잊고 있었던 라자스탄 특유의 매캐한 향이 올라와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신고식 한번 제대로 치르는구나... 세상 어디에 여기만큼 감각에 도전하는 곳이 있을까.

블루 시티 조드푸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메흐랑가르(Mehrangarh) 성채이다. 영화 배트맨 시리즈 중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나와서 더 유명해진 이곳에 올라가면, 저 멀리 파란 집들이 모여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카스트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일반인과 구분되도록 자신의 집을 파란색으로 칠한 데서 탄생된 풍경이다. 하지만 요즘은 새로 짓는 건물마다 파란색으로 칠해버려서 희소성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는 추세... 그래도 숨막히는 사막에서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시원한 푸른 빛이 도는 골목을 누비다 보면 인도의 다른 지역보다는 확실히 덜 지치긴 한다.

골든 시티 자이살메르의 구조는 아주 독특하다. 마을의 한 중간에 오래된 성채가 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유적지와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성밖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이 모여 골목마다 움푹 패인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고 있지만, 성 안의 마을은 그보다 좀 더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이살메르에 가신다면 성 안에 있는 숙소에서 묵으시길 바란다. 오래된 가옥들 사이로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분위기가 흐르는 이곳에서 성 아래의 전망과 사막의 별을 올려다 보는 것도 좋을 듯.

거대한 피촐라(Pichola) 호수 주위로 하얀 웨딩케이크 같은 건물이 늘어서 있는 우다이푸르의 첫 인상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물은 확실히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호수 주위로 형성된 가트에서는 언제든지 빨래와 목욕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우다이푸르는 라자스탄의 다른 도시보다 훨씬 깨끗하고 악취도 덜했으며, 각종 예술 공방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었다.

라자스탄 특산물인 가죽 공예는 우다이푸르에서 더욱 다양해진 재료와 신세대 장인의 손길이 만나 한층 진화된 형태의 디자인을 생산해냈다. 골목 어디서나 발견되는 수준급의 세밀화는 마을 전체가 갤러리 같은 느낌이 들게 했으며, 악기상에서는 악기만 파는 게 아니라 가게 주인이 직접 음반도 내고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이토록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깨끗한 마을이라니. 우다이푸르가 인도의 다른 예술 마을과 다른 점은 바로 이 청결함에 있었다. 물이 풍부해서 오염물이 쌓이지 않고 씻겨내려갈 수 있으니 그렇게 정화된 곳에서 더 높은 차원의 예술이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느 날은 피촐라 호수의 야경을 찍으려고 숙소에 있는 옥상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옆 건물에서 열리는 댄스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다로하(Dharohar)라고 하는 라자스탄 지역의 전통춤이라는 것을 알고 그다음부터는 매일밤 옥상에서 무료 공연을 즐겼는데, 화려한 사리를 입은 무용수들이 무한 회전을 돌 때면 김연아 선수의 트리플 악셀이라도 보는 것처럼 짜릿한 황홀감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공연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의 춤이었는데, 사막 지역인 라자스탄 주의 물이 부족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유연하면서도 애절한 그녀의 춤사위가 마치 타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물 좀 아껴 써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인도는 물이 부족한 나라였구나.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그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행지'에 집중하다가 어느새 여행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때 특히 그렇다. 그럴 때면 열려 있던 감각도 모두 닫혀버린 느낌이다. 라자스탄은 그렇게 닫혀 있던 내 감각들을 다시 활짝 열어주었다. 적도의 뜨거운 열기가 촉각을, 매캐한 향신료가 후각과 미각을, 애절한 예술이 시각과 청각을 열어 나를 두드려주었다. 그대, 깨어있으라.

keyword
이전 09화시크교의 성지 암리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