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티 오브 조이>에서 미국 의사 역의 패트릭 스웨이지와 인도의 인력거꾼 옴 푸리의 명대사는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도의 참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세상에 인간이 동물처럼 수레를 끄는 곳이 아직도 존재하다니! 최고의 빈민층만 모아놓은 마을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시티 오브 조이'라니... 아주 오래전에 나온 영화지만, 배경인 캘커타에 대한 충격은 꽤 오래갔던 것 같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인도 여행을 준비하려는 순간, 잊고 있었던 그 두려움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그렇게도 비인간적인 캘커타를 과연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하지만 델리의 국제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서바이벌이 시작된 인도 여행에서 오히려 유럽풍의 현대적인 캘커타는 대도시의 인프라를 마음껏 누리며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1686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들어오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캘커타에는 유럽풍의 건물과 현대의 마천루가 혼재되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행자 거리 서더 스트리드(Sudder Street)에서 후글리 강 쪽으로 길을 하나 건너면 거대한 마이단(Maidan, 광장)이 형성되어 있고, 한쪽에는 화려한 빅토리아 기념관이 우뚝 서 있어 마치 인도가 아닌 듯한 인상을 주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영락없는 인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참고로 캘커타(Calcutta)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어식 표기이고, 독립 후 힌두식 명칭인 콜카타(Kolkata)로 개명되었지만,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캘커타로 배워서 그런지 영어식 지명이 더 익숙한 건 어쩔 수 없다.
콜카타의 명물은 아무래도 이 인력거일 것이다. 영화 <시티 오브 조이>에서 한없이 비루하게 살던 불가촉천민들의 생계 수단으로 나온 이 교통수단은 인도의 다른 도시에서는 사라졌지만, 영화의 유명세를 타고 오히려 콜카타의 명물이 되어 관광 명소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다져주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담긴 저 에코백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가 묘하게 매치됐다. 이쪽 삶이든 저쪽 삶이든 결국은 해피 엔딩이 아니었기 때문에...
콜카타는 또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태어난 곳이며,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가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일제 치하의 조선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 준 시 <동방의 등불>로 유명한 시인이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여기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격려가 되고 고마운 시인데, 그 당시 동아일보에 기고되는 과정에서 그의 시집 <기탄잘리(Gitanjali)>의 35번째 시가 추가되고, 원문에도 없는 '코리아'가 마지막 행에 다시 한번 등장하면서 역사의 왜곡과 타고르에 대한 과대 포장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밝혀진다.
참고로 <기탄잘리>에서 지고지순한 절대적인 존재를 '님'이라 표현한 그의 시풍은 만해 한용운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래서 두 사람의 시를 읽다 보면 사뭇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 또한 한때 타고르의 시에 꽂힌 적이 있어서 콜카타에 가면 꼭 그의 생가(타고르 박물관)에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그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과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처지가 비슷해서 그의 시가 더욱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타고르 하우스(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그러나 식민지 시절에도 성공한 무역가였던 부자 할아버지와 개혁 사상가였던 지식인 아버지라는 백그라운드를 등에 업고 귀족처럼 살다 갔을 거란 냄새가 박물관 곳곳에서 풍겨 나오자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집이 얼마나 웅장했으면 현재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인가. 이 집은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문예 활동을 한 곳으로, 벵골 문학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네상스의 살롱 문화가 식민지 시대 인도의 부잣집에서 재현되었다는 것이 뭔가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부자였던 사람들은 그 역할이 있어서 부가 주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당시 인도와 영국의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하고 집에서 문예 창작 활동을 하다가 40세에 샨티니케탄(Shantiniketan)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자연학교를 설립하고 무상 교육을 제공하게 된다. 자연을 벗 삼아 야외에서 토론하며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를 배우도록 하는 그의 교육 이념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래서 학교 안에는 건물보다 야외에 설치된 단상이 더 많은데, 건물 안의 흔한 교실 대신 이런 자연 속에서 모여 앉아 자연의 섭리를 스스로 깨치도록 하려는 그의 이념이 엿보인다. 건물마다 그려진 소소한 벽화와 착한 물가, 상인들의 강매나 사기가 없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진정 평화로운(shanti) 마을(niketan)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서두르고, 영리한 자는 기다리고, 현명한 자는 정원으로 간다.
타고르의 이 말을 가끔 되새겨 본다. 빨리 가려고 지름길을 택하면 위험수가 따른다. 그렇다고 빠른 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일. 그럴 땐 반 템포 늦춰서 정원이든 어디든 지금의 환경과 다른 곳으로 잠시 이동해서 숨 고르기를 해보는 거다. 그런 시간적인 여유조차 줄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숨 막히게 돌아가는 콜카타에 지친 당신이라면, 기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샨티니케탄에 잠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