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질링 티 한 잔

by traveLife

단순히 홍차를 마시러 간 건 아니었다. 5월의 혹서기가 너무 뜨거워서 잠시 더위를 피하고자 옮겨간 다르질링(Darjeeling)은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골 마을로, 여름에도 가끔 윈드재킷을 입어야 될 정도로 서늘한 곳이었다. 또한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산 칸첸중가(Kangchenjunga, 8586m)가 마주 보이는 첩첩산중에 있어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의 평범한(?) 기차 시스템은 캘커타에서 뉴잘패구리(New Jalpaiguri)까지만 연결되고, 거기서 다르질링까지는 토이 트레인(Toy Train)이라는 산악 철도가 따로 운행되고 있었다.


인도에는 산악 지역을 관통하는 토이 트레인이 총 3군데가 있는데, 모두 영국 식민지 시절에 물자 운송을 위해 건설되었다. 그중 2곳은 히말라야 산맥을 관통하는 다르질링 히말라야 철도(Darjeeling Himalayan Railway)와 칼카-심라 철도(Kalka-Shimla Railway)이고, 나머지 하나는 남쪽 타밀나두 주의 평야와 산간 지방을 잇는 닐기리 산악 철도(Nilgiri Mountain Railway)이다. 토이 트레인은 아름다운 산세를 감상하며 올라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스케줄이 다양하지 않고, 비수기나 잦은 공사로 운영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서 항상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내가 갔을 때에도 마침 공사 중이어서 뉴잘패구리 역에서 합승 지프를 타고 다르질링까지 올라가야 했다.

토이 트레인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한껏 풍경에 취해 있는데, 본격적인 꼬부랑 산길을 오르자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4시간 걸린다던 것이 3시간으로 단축되어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다. 다르질링에 도착했음을 알려준 것은 정면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칸첸중가의 위용이었다. 이름처럼 5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을 그때 찍어뒀어야 했는데... 도착한 날을 제외하고 내내 비가 와서 칸첸중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위 사진은 세계테마기행의 화면을 캡처한 이미지다.)

기차역이 있는 것만 빼면 산등성이를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낡은 집과 티베트 불교의 오색 깃발이 펄럭이는 풍경이 티베트 망명 마을인 다람살라를 떠올리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르질링은 주민의 대부분이 티베트족이며, 다르질링이란 지명도 티베트어로 천둥(dorje)의 땅(ling)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차역과 지프 스테이션의 중간쯤에 있는 로터리에는 이런 팻말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Welcome to the land of Ghorka's


고르카(또는 구르카)는 지금의 네팔 왕국(구르카 왕조)을 세운 부족의 이름이다. 다르질링은 원래 시킴 왕국(현재의 시킴 주)의 영토였는데, 18세기 네팔의 구르카족에게 점령되어 19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네팔의 지배를 받았다. 그 당시 네팔의 구르카 용병은 용맹하면서도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쿠크리(Kukri)라는 낫과 비슷하게 생긴 칼을 차고 다니면서 적군의 신체를 무자비하게 잘라갔다고 한다. 그 명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세계 각국에서 네팔군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으며, 2018년 북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의 지도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렇듯 티베트족 외에도 네팔의 구르카족, 몽골족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는 다르질링에 영국 식민지의 자취가 더해져 동서양의 묘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절의 중심지였던 캘커타와 가깝다는 이유로 영국인들은 시원한 다르질링을 휴양지로 개발하였으며, 세계 최고 등급인 홍차를 재배하고 운반하기 위해 고립된 산골 마을에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교통수단이 바로 이 토이 트레인이다. 원래는 뉴잘패구리부터 다르질링까지 5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행하지만, 지금은 선로 공사 때문에 굼(Ghum)까지만 운행되고 있었다. 30분도 안 되는 짧은 구간이지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이용해보자 싶어 타봤는데, 놀랍게도 아직까지 옛날 방식의 증기 기관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는 길의 풍경은 흔한 티베트 마을의 모습이지만, 석탄을 때서 물을 데우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팀을 뿜는 이 19세기식 교통수단을 타고 있으려니 제대로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메인 도로인 Hill Cart Road를 따라 걷다 보면 거대한 해피밸리 차 농장(Happy Valley Tea Estate)이 나온다. 다르질링은 스리랑카의 우바(Uva), 중국의 기문(祁門)과 함께 세계 3대 홍차로 꼽히는 품종으로, 생산량이 적어서 다른 홍차보다 가격이 두 배 정도 비싸다고 한다. 홍차의 수확 시기는 3~4월의 첫물차(first flush), 5~6월의 두물차(second flush), 우기가 끝나는 10월 이후의 세물차(autumnal)로 나뉘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는 5월 중순이라 두물차가 한창이었다. 찻잎을 따서 공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니 입구의 관리인이 소정의 가이드비를 받고 견학을 시켜주었다.


차의 가공 과정은 남미에서 봤던 커피 공정과 거의 비슷했다. 말리고, 식히고, 볶고, 건조시켜서 포장까지 모든 과정을 공장 내 통유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같은 다르질링 티라도 찻잎의 상태와 가공의 차이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데, 여기서 파는 것은 'Super Fine Tippy Golden Flowery Orange Pekoe 1'으로 다르질링 홍차 중 최상등급이라고 한다. 이름이 좀 긴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Tippy: 끝부분의 어린싹. 조심스럽게 수확해 세밀하게 가공한 찻잎

Golden: 가지 끝의 어린 새싹이 홍차 가공 후 황금빛으로 변함

Flowery: 줄기 끝 맨 위의 어린 새순

Orange Pekoe: Flowery 다음으로 최초의 작은 잎. 새싹이 붙어 있음

Pekoe: 오렌지 페코보다 작고 새싹 함유량이 적음

1: First Grade Leaves


평소에 차보다 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설명을 건성으로 들었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기존의 떫은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놀랐다. 홍차가 이렇게 맑은 맛이었던가. 언뜻 과일 맛이 느껴져서 이름 속에 들어간 오렌지 때문인가 했는데 그것보다 더 달콤한 것도 같았다. 알고 보니 다르질링 홍차는 포도 맛이 느껴지는 특색이 있어서 다른 품종의 차나 우유 같은 것을 블렌딩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다르질링에 와서 몰랐던 홍차의 매력을 느낀 순간이었다.


차냐 커피냐 그것이 문제로다.


차알못이지만 언제 이런 최고등급의 홍차를 마셔보겠냐며 다르질링에선 부지런히 마셔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다르질링을 벗어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짜이를 찾게 될 거라는 걸. 인도를 벗어나는 순간 다시 커피를 마시는 생활로 돌아갈 거라는 걸.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실컷 경험해놓자. 지금 당장 비용이 조금 더 든다고 해서 거기에 들인 당신의 고귀한 시간만큼 비싼 것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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