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케시에서 아침저녁으로 요가를 하며 건강하게 지내던 어느 날, 늘 지나가던 요가 스쿨 옆 기념품 가게에서 우연히 한국 아저씨를 만났다. 요가를 하는 마을이니 화제는 당연히 요가로 흘러갔는데, 그분 말씀에 의하면 리시케시에 알려진 요기(yogi, 요가 수행자) 중 제대로 된 요기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요가 수트라(경전)>를 최초로 집대성한 파탄잘리(Patanjali)의 정신이며, 그 요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전도 읽지 않고 무슨 요가를 하냐며 처음 보는 나에게 쓴소리까지 해서 기분이 상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분이 나의 모자란 점을 일깨워주고 채워준 것 같다.
한국에서 요가를 배울 때 늘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몸은 이렇게 수련해서 홀가분해졌는데, 그만큼 내 심리도 안정이 되었는가 살펴보면 딱히 그렇지가 않은 거다. 요가를 할 때는 안정되었다가도 집에 오면 늘 제자리였다. 요가의 최종 목적은 명상이고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거라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 경지에 가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요가를 가르친다는 사람들도 말로는 요가가 최고의 수련이라고 하면서 늘 더 나은 수련법을 찾아 헤매는 걸 보면, 그들 역시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를 읽으면 요가의 정신을 알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헤매지 않고 안정된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리시케시에서 만난 그분한테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 대신 첸나이 근처의 아쉬람 하나를 알려주었다. 계획에도 없던 남인도를 나는 그렇게 방문하게 되었고, 요가의 정신을 알 수 있을 거라던 그분의 조언과 달리 내가 얻어온 것은 라마나 마하르쉬(Ramana Maharshi, 1879~1950)라는 남인도의 성자가 자아 탐구(self-enquiry)로 깨달은 '참나'에 대한 정보였다.
마음이란 무한한 것을 정의하려고 한다.
너의 몸이 실체라고 생각하지 마라. 몸속에 내재된 실체를 찾아라.
그러면 생과 사를 통해 모든 병을 물리치리라.
몸속에 내재된 것은 너의 마음이며, 그곳의 실체는 바로 신이며 자기 자신이다.
- 라마나 마하르쉬의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
그의 이론은 리시케시의 성자 시바난다(Swami Sivananda, 1887~1963)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의사였던 시바난다는 병의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아유르베딕 치료법과 요가 수련법을 전파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Nisargadatta Maharaj, 1897~1981) 역시 '자기 탐구'를 강조했는데, 그래서인지 마하르쉬와 마하라지의 저서는 비슷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마치 서로 문답을 하고 있는 듯한 이 두 권의 책은 조용한 인도의 시골 마을에서 서방 세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된다. 그 외에도 크리슈나무르티나 오쇼 라즈니쉬 같은 Export guru(세계의 스승)에 열을 올리는 서양 여행자들을 인도 곳곳에서 마주쳤는데, 아마도 그해에는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를 해보라고 그런 인연들을 만난 게 아닌가 싶다.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85-1986)는 라마나 마하르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지만, 일찍부터 Export guru로서 서방 세계에 유명세를 떨쳤다. 그를 발굴해준 곳은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신지학회(神智學會)였는데, 그는 학회를 떠나 신앙과 교리를 초월한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관찰자로서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것'을 찾지 못해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알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이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중
이 세 명의 성자들이 내놓은 자아 탐구의 이론에다가 현대적인 감각의 동적인 명상 수행법을 첨가한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 1931-1990)의 명성은 같은 인도인으로서 동시대에 이름을 알린 크리슈나무르티에 비해 '히피'라는 시대적인 흐름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퍼지게 된다.
광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상 이하로 떨어지는 광기이며, 다른 하나는 정상을 초월하는 광기이다.
정상 이하로 떨어지면 질병이며, 정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상을 초월한 광기는 건강해진 상태로, 그때 완전한 존재가 된다.
정상을 초월한 광기 속에서 그대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
- 마 프렘 순요의 <오쇼, 삶의 기록> 중
이러한 논리로 그는 기존의 고요한 명상법이 아닌 움직이며 분출하는 다이내믹 명상을 전수하였고, 같은 이치로 성에 대한 관념도 억압할 게 아니라 꽃피워서 정신적 초월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만났던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저 사람의 아쉬람을 갔다 왔다고 하여 궁금하긴 했지만, 보수적 성향인 나는 그의 성에 대한 견해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늘 궁금했다. 무엇이 그들을 가끔 오만하게 만들었으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절대 진리로 믿도록 만들었는지...
그러던 중 오쇼가 미국에서 한때 일궈놓았던 공동체에 대해 고발한 책 <타락한 신>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책 속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역사상 깨달은 자가 나 이외 8~9명이 더 존재하지만,
한 시대에는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휴 밀른의 <타락한 신> 중
이 책이 왜 절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저자가 작정하고 오쇼를 까내리기 위해 썼다는 의견도 있는데, 아무리 오버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경험자의 간증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을 시켰다면 대가를 지불하거나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저 공동체의 사유지를 일구는 것이 과연 '공적인' 명분이라 할 수 있을까? 다이내믹 명상도 결국은 inner peace를 위한 것이 아닌가.
혜민스님의 어록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로 깨달은 스승은 자기만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고 좋은 스승이 있으면 거기에도 가서 배우라고 합니다.
제자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지, 제자가 스승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스승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나를 더 사랑한다면 그 조직에서 나오세요.
세상에 스승이라고 나온 사람들이 오만함을 버리고 다른 사상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굳이 애써 알리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서 구루로 떠받들어줄 텐데... 나는 특정 인물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잠시 오만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나 역시 그의 저서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한 시대의 성자들이 나와서 내놓은 이론도 한때의 트렌드인 것 같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고차원적인 지식과 사상이 쏟아지고 있으며, 직접 가보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나온 지식을 나에게 맞도록 잘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100%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에 맞추어 항상 변하는 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