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이처럼 내 몸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때론 신비하고 새삼 감사한 일이다. 눈을 뜨자 하면 뜨고, 팔을 뻗자 하면 뻗고, 무릎을 굽히자 하면 굽혀지는 그 신비. 생각이란 것이 뇌의 신경전달물질들을 거쳐 근육까지 통과하는 그 빠르고 즉각적인 반응은 경이롭게도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을 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그래서 도움이 되나 보다 한다. 내 몸에 대한 주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는 일에 도움을 준다. 반복할수록, 훈련할수록 나아질 수밖에 없는 몸의 순환은 ‘이걸 했으니 저것도 할 수 있겠다’라는 정신적 성취를 동반한다.
구기 종목을 무서워하고, 살기 위한 움직임 외에 ‘몸’을 위한 운동을 멀리한 내가 스쿼시를 하자니, 몸뚱이는 한없이 뚝딱거린다. 시선과 팔은 분명히 공을 겨냥했지만 헛스윙을 하거나, 포핸드의 자세로 나아가다 스텝이 꼬여버리거나, 백핸드를 치려다 손목이 꺾여버리기 일쑤다. 강사님조차 단번에 “운동 안 한 지 얼마나 됐어요?”라고 질문 겸 돌려까기를 시전하셨다.
몸을 얼마나 미세하고 정확하게 제어하느냐는 타고난 것에 더해 개인의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운동선수들이 그렇듯, 오랫동안 노동한 이들의 노하우가 그렇듯. 몸을 많이 써봐야 가능한 일이고, 몸을 쓰는 데에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자신의 몸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이만큼은 버틸 수 있다. 내가 이 이상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는 한계치를 인지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한계를 인지하는 훈련. 그 인지와 훈련이 동반되면 극복이 되고, 인지에서 멈추면 제약이 된다. 넓은 코트 안에서 작은 고무공을 벽으로 계속 쳐내다 보면, 30분만 지나도 온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치는 것이 느껴진다. 분출되는 땀으로 얼굴은 터질 것 같고 이제 그만두라는 내부의 외침이 끊이지 않는다.
마스크 아래로 쉬어지는 숨에서 녹슨 맛이 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쉴수록 가슴에 구멍이 뚫린 양 숨이 색색 세어나가지만, 어쩐지 기분만은 나쁘지 않다. 몸이 적응 중이라는 것. 이겨내는 중이라는 증거이니까. 그것은 반드시 명확한 진실이다. 운동하는 이들의 기쁨은 그것일 것이다. 반드시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진다는 것. 몸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는 것.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 힘을 느껴보았다, 나는 생각보다 큰 즐거움을 얻었다. 그리고 안심했다. 찜찜하게 헷갈렸던 공식을 새로운 노트에 깔끔하게 정리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어떤 응용문제든 다 풀어치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든다. =몸이 정신을 지배한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근손실은 계속되고, 손실되는 것은 근력뿐 아니었다. 나의 체력도 지구력도 그에서 파생되는 인내심과 세상에 대한 다정함도 몸에서 한없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는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에 종말을 고하고 싶다.
내 삶을 지탱할 모든'력力'들을 다시 그러모아야 한다. 나의 피부와 내부 조직에 도망 못 가도록 옭아매 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 반복하고, 실패하고, 극복하는 ‘몸’에서 ‘정신’으로 가는 길을 갈고닦는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공을 치면 반드시 내게로 온다. 그것을 내가 다시 전과 같은 세기와 속도로 받아칠 수 있음에 기쁨을 느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