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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Nov 11. 2021

당신은 천재입니까?

한가한 생각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드라마다. 는 좀 지나치고 3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초등학생 때부터 땅 따코는 토렌트, 풀빵닷컴, 엠군, 유쿠 등등 국내, 해외 사이트를 가리지 않고 전전하며 트로이목마와 싸웠으며, 온갖 성인물 광고와 대출광고들에도 절대 현혹되지 않고 한국 드라마부터 해외 드라마까지 모두 섭렵했더랬다. (지금은 저작권 의식이 투철한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드라마 속 사랑, 연애, 직장, 사회라는 것에 매료되었었고 그것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리라는 굳건한 믿음은 나를 얼른 어른이 되지 못해 안달 나게 했다. 방문 밖에서 어떤 물건이 집어던져지든, 어떤 고성이 오가든, 나는 고물 헤드폰을 쓴 채 화면 속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월화, 수목, 금요, 주말 드라마에 일일드라마 어쩔 때는 아침드라마까지 챙겨봤다. 한 드라마가 끝나면 재빨리 다음에 볼 드라마를 대기시켜 놓아야 불안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나의 도피처였고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만사 OK인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장래희망란’이란 극악무도한 빈칸에 PD라 대충 얼버무려 쓰기 시작했더랬다. PD가 뭐의 약자인지도 모르면서 그랬다. PD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지도 모르면서도 그랬다. 그때는 직업에 대해 생각했다기보다 그 ‘이야기’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창작자이며 사회적 지위도 갖는 직업, 부모님이 어디 가서 “우리 딸은 이게 되고 싶대”라고 말하기 수월한 직함은 ‘방송국 PD’라고 스스로 합의를 봤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들을 창작하는 이들을 선망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여기서 이런 대사를? 어떻게 여기서 이런 화면 전환을? 어떻게 여기서 이런 반전을? 작가, 연출가, 미술감독, 음악감독, 조명감독, 촬영감독, 스크립터 내가 호명할 수 있는 모든 제작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을 ‘천재’라 칭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천재’들의 재능이 하나의 작품으로 집약되는 것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맨땅 위에 50층 아파트를 세우는 것보다, 육지와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남들이 인정해주는 직업’을 가져야 하는 취준생이 된 지금, 나는 PD의 꿈을 접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으며 그 직업을 갖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은 내게 맞지 않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어떤 드라마를 봐도 재미있지 않고, 쉽게 천재적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천재성보다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집합체로 ‘종합예술’보단 ‘종합 노동’으로 우선적으로 인식되어 버리고 만다.


요즘 내가 ‘천재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꾸준함’과 ‘평범성’이다. ‘평범’하다는 말은 많은 이를 소외시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많은 이를 포함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노동을 하고 그에 값을 매긴 급여를 받으며, 그 돈으로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고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 여건이 되는 한 연애하고, 더 여건이 된다면 결혼에 까지 이르는 사람들. 은행의 까다로운 대출요건을 충족하고 내집마련에까지 성공하는 사람들. 이제는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불리는 사람들.


내 눈엔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치를 해내는 사람들을  어른들은 그리고 사회는 아주 쉽게 ‘평범’하다고 부르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평범함에서의 박탈감을 느낀다.


그 평범함이라는 것은 마치 실존해선 안되고 신화로만 존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같은 개념으로 느껴지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 평범을 성취해내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평범함들은 운이 좋아서, 타고난 능력치가 좋아서 얻어지는 일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개인의 온전한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진다. 나에겐 죽기보다 어려운 그 과정을 꽤나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내는 일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는 것은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보다, 미국에서 그랜드캐니언을 보는 것보다, 스페인에서 투우 경기를 보는 것보다 더욱더 경이롭고 신비하다. 도저히 손에 닿지 않고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느껴진다.


여기서 ‘천재성’이라는 개념이 재정립된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무조건적으로 나아가는 그들이 나에겐 ‘천재’로 비친다. 무엇보다 싫음을 견뎌내는 능력치. 또는 싫음의 임계치가 아주 높은 사람들. 단순히 감정에 시달리지 않으며 하나의 인생으로서 빚어지는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순응함으로써 저항해 가는 사람들. 그들의 '천재성'은 그 어느 것보다 이 사회의 세찬 동력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으로, 진정한 한 세대의 문화와 인생으로 역사에 남는다.


얼마 전에 결혼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용규 오빠, 회계사가 되어 가난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은혜 언니, 삼 남매를 키우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단풍구경을 다녀온 미애 언니, 2-3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께 손 벌리는 일 없이 자신의 공간을 꾸려나가는 소라, 졸업하기도 전에 전공까지 살려 턱 하니 회사에 취직한 혜미,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2남매를 키우느라 허리가 굽고 손목이 휘어버린 나의 엄마, 그리고 아빠.


당신들의 삶이야말로 가히 천재적이다.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삶이며, 그 무엇보다 정면 승부하고 있는 삶이다. 드라마 <언내츄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죄악이 많아, '노동'하는 것으로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노동'은 숭고한 것이라 믿고 싶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먹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전부인 삶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믿고 싶다. 다 떠나서,


하늘이 내려준 인재들이여, 오늘 하루도 존경했고, 소중했다.

<언내츄럴> 추천한다. 재밌더라. 작가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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