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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Jun 01. 2023

오해

넥타이를 맨 소년

엄지발가락이 허벅지에 닿는 감촉에 잠에서 깬다. 전 연인에게 죽은 사람의 것도 이보단 따뜻할 거라고 타박을 받았던 양발에 극심한 한기가 들었다. 머리와 발끝이 허리 부근에서 갈라지며 두 인간의 혈류가 흐르는 것처럼 냉해진 발은 핏기 하나 없었다.


날이 영하로 떨어지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족냉증은 기온이 높은 곳에 있을수록 심해졌다. 이불을 덮고 있을 때면 언 발의 냉기가 무의식까지 침범해 가위에 눌리기도 자주 눌렸다. 그날은 새벽 1시에 가위에 눌려 불쾌하게 깨어난 날이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강한 압박감에 가까운 편두통까지 몰려왔다. 귓가로 옅은 바람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이사를 결정한 이유기도 했던 오래된 빌라의 외풍은 대설주의보가 내린 내일을 앞두고 기승이었다.


보아하니 다시 잠들긴 글렀고 책을 읽자니 각막은 사포처럼 거칠했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배송 트럭이 불을 밝히는 골목에선, 희미한 라일락 향이 났다. 낮 시간에는 빌라 맞은편 골목 식당가의 곱창 누린내와 양파 볶는 냄새로 가득한 거리가 저녁이 되면, 거짓말처럼 꽃향기로 가득 찼다. 한두 골목 건너에 심어진 라일락 나무에서 풍겨오는 향인 듯했다.


붙박이장을 열어 패딩을 꺼냈다. 원래는 동물의 것이었던 패딩의 충전재는 꺼질 대로 꺼져 납작해졌고, 움직일 때마다 겨드랑이나 주머니 틈에서 흰 오리털이 사붓 날리는 오래된 겉옷이었다. 그 옷에는 지난한 입학식, 졸업식, 송년회, 망년회, 신년회 같은, 코끝이 시리며 어쩐지 우중충한 시작과 처음들이 묻어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발에 익은 동네길을 걸었다. 밤에 충동적으로면 집을 뛰쳐나올 때면 가로등을 따라 걸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은 무서워 발을 디딜 수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도로 쪽으로 몸을 붙였다. 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의 도로는 낮 동안의 소란을 묻고 과묵해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 밤에 나 혼자 부산하게 걷다 보면 반드시 까만 점 같은 전환점이 나왔고 피할 수 없는 골목 어귀를 만났다.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가장 어두운 곳, 그곳 어귀에는 빛바랜 빨간색 파란색 글자로 ‘잉글랜드 양복점’이라 새겨진 양복점이 하나 있었다. 그 양복점 안으로는 주인은 물론 누군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의욕도 활기도 없는 가게였다. 그런데 빛이 보였다. 빛은 미세하고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양복점 주인이 보였다. 그 위로 투박한 손이 보였다. 희미한 조명은 양복점 주인의 턱부터 명치까지를 비추고 있었다. 넥타이를 잡은 전완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있고 양복점 주인은 숨이 모자라 발버둥 치고 있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양복점 주인의 턱이 벌벌 떨리고 있었고 빛을 받은 안구는 붉게 실핏줄이 터져갔다. 동그랗고 작은 불빛의 근원지는 헤드램프였다. 사람의 움직임. 헤드램프를 낀 남자가 노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재단대에 노인을 뉘인 채로 넥타이로 힘껏 목을 조르고 있었다.


불빛이 나를 향했던 것 같다. 순간 눈이 먼 것 같이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선택지는 하나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것. 도무지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텅 빈 새벽의 목격을 도로에 묻고 언 발이 타오르도록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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