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걷고 있었을 뿐이다. 엉킨 두 그림자를 밟기 전까지.
수희가 본 것은 아주 사랑스러운 연인 같기도 철천지원수 같기도 했는데, 확실한 건 두 개의 형상이 피부 깊은 곳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희는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하루 종일 맘 편히 앉지 못했다. 온몸에 밴 기름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고, 오븐에 덴 손마디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집에 가서 이 더럼과 피로를 한 번에 씻어 내리고 싶다는 욕구만 들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그림자를 지나야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얼굴을 맞대고 그릉 거리는 소리를 내는 발정기 고양이 같은 두 어린 냥(?)들을 필사적으로 못 본 척해야 했다. 수희는 밤거리에선 볼륨을 줄여놓는 이어폰을 귀에 고쳐 넣고 계속 걸었다. 연인은 점점 달아오르는 듯했고, 수희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남의 타액을 상상하는 일만으로 기분까지 더러워지는 듯했다.
B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일어나 버린 그런 우연. 수희는 B를 한 번에 알아봤다. 가로등 아래에서 품에 안은 이를 녹일 듯이 끌어안던 그 몸이 어떤 것보다 그를 알아보게 했다. 책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B를 다시 만났고, 가로등에서 쏟아지던 주황빛에 이어 그를 종이의 질감과 냄새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그것은 어떠한 우연의 연속이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수희는 생각했다.
B는 자주 웃지 않았다. 어색하거나 모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웃음을 자주 이용하는 수희와 달리 B는 별로 웃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웃음은 아주 귀한 것처럼 여겨졌다. 웃는다면, 진정 진귀한 이한테나 웃어줄 것 같았다. 수희는 그래서 그 웃음이 그토록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수희가 B의 몸을 반사적으로 피한 것은 어떠한 감각의 발현 때문이었다. 기름 쩐내, 화끈거리는 손바닥, 납덩이같이 한없이 아래로 꺼지는 몸.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B의 체취에 실려 왔다. B에게선 별 향이 나지 않았지만, 가만히 맡아보면 은은한 나무껍질 냄새가 났다. 웃지 않는 B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내가 아니었음 하는 일에, 꼭 나여야만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희의 물음에 B는 한참을 고민했다. 네가 아니었음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B는 물었다. 수희는 그런 일은 많다며, 예를 들면 친구의 살인을 도와줘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든가, 가족이 좀비가 됐다든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된다든가, 외계인의 간택을 받아 다른 행성으로 떠나야 한다든가 하는 일이 있잖느냐고, 수희는 부러 터무니없는 것들을 나열했다. 그때 B는 조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떠한 허탈함 같기도, 자조 같기도 해서 수희의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다.
전 연인의 이야기를 묻진 않았다. 과거의 흔적을 닦아내지 않은 채로 불편함 없이 생활하는 게 수희의 특기였다. 즉, 분명히 묻은 과거의 흔적을 알아채는 이만 없다면 계속해서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수희는 과거의 흔적을 묻는 이들을 혐오했다. 마음의 흔적을 들키면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에 쩍쩍 들러붙었다 떨어지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혐오하는 만큼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기에, 수희는 호기심에 지지 않으려 자주 괴로워했다.
네가 아님 안 되겠어. B가 말했다. 시선이 엇갈렸다가 다시 맞춰졌다. 수희는 어딘가 두려워지는, 심장에서 가장 먼 저 뒤꿈치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거짓말하지 마. 수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수희는 당장이라도 B의 품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크고 아늑해 보이는 그곳에 제 얼굴을 부비고 싶었다.
내가 네가 아니었음 하는 일이냐고 B가 물었다. 수희는 그건 너무 슬프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가 아니었음 하는 일이라니. 내가 네가 가장 부정하고 싶은 존재라니. 내가 너만 아니면 된다니. 그건 아무래도 정말 비참한 생각이라 B의 생각을 바로잡고 싶었다.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끄덕일 때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하얀 신발 코에 한 방울이 뚝. 파란 아스팔트 바닥 위로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끄덕이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처박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B가 웃었다. 큰 손을 수희의 머리에 얹고 소리 내어 웃었다. 수희의 정수리가 금세 뜨끈해졌다. 수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었다. B가 수희를 바라봤다. 진정 진귀한 것을 보는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