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오후 5시 50분. 인천(ICN)에서 애틀란타(ATL)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28박 29일. 내 짐은 19.8 kg.
사계절 옷, 수영복, 망원경, 우산과 우비까지 챙겼다. 남미라는 흔치 않은 여행지인데도 특별히 새로 산 건 없다.
딱히 뭘 준비하지도 않았고, 이상할 만큼 마음도 담담했다.
기내식을 먹고 난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10분,
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이번 여행의 테마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국내도 아니고 해외인데도, 특별한 목적 없이 가고 있다.
그저 집을 나섰다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유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
그런데 쉬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해외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국내에서도 쉴 수 있는데, 왜 돈 들이고, 짐 싸고, 비행기만 20시간 넘게 타야 하는 걸까?
언어도, 물가도, 거리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왜 굳이?
예전의 나는 그렇게까지 떠나는 이유가 분명했다.
‘비싼 돈 내고 가는 여행이라면 뭐라도 얻어야 한다’는 생각.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운다는 명분.
사전에 공부하고, 현지에서도 메모하고, 돌아와 정리하며 '무엇을 배웠는가'를 되물었다.
여행도 학습의 연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가?’가 아니라 ‘그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그 다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지금은 그게 여행이자, 배움이다.
살다 보니 깨닫는다.
다름은 다르지 않다는 것.
밥을 먹느냐 빵을 먹느냐, 자동차냐 오토바이냐, 고층이냐 평지냐.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것.
삶을 대하는 자세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다는 것.
사람 사는 건 결국 다 비슷하다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된다.
이제는 낯선 환경 속에서,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들 삶 속으로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나를 배우는 시간.
살사를 배우고, 동네를 걷고, 낯선 사람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천천히 나를 다시 쓴다.
조성진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 흐른다.
헤드폰과 마스크는 이 공간에서 나를 조용히 분리시키는 도구다.
곧 기내등이 꺼지면 사람들은 하나둘 잠들겠지.
나는 혼자 눈을 깜빡이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쓸 것이다.
이 호젓한 시간이, 오히려 여행보다 더 여행 같다.
올해 6월, 이번 여행을 ‘내게 주어진 당면 과제’로 정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루라도 더 젊을 때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 여행은 내 평생 가장 험난할 수도 있는 여정이다.
방문국들의 경제 사정, 거리, 치안, 환경까지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인천에서 애틀란타, 다시 리마까지.
비행시간만 22시간, 경유지에서 하룻밤 자고 리마에 도착하면 총 41시간이 걸린다.
콜롬비아, 쿠바 갔을 때도 20시간 넘게 걸렸으니, 뭐 이쯤이야.
괜찮다. 가고 싶었던 곳이니까.
10년 전, 멕시코 친구 나타샤가 함께 가자던 파타고니아.
드디어 그 땅을 밟는다.
안데스 산맥 최남단, 피오르드와 빙하, 거친 바람이 만들어낸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지구 반대편, 노란 열정의 나라 브라질도 간다.
이과수 폭포, 예수상, 노래 속 코파카바나 해변까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가 있고
탱고, 반도네온, 밀롱가를 직접 경험할 것이다.
각 나라의 술도 기대된다.
페루의 '피스코사워', 볼리비아의 '치차', 칠레의 '크리스탈', 아르헨티나의 '말벡', 브라질의 '브라마'.
입안에 담긴 남미의 맛은, 몸에 오래 남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뉴욕, 블루노트에서 재즈를 듣고, 브로드웨이에서 ‘알라딘’의 지니를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 이 여행의 끝을 천천히 감을 예정이다.
노트북과 태블릿 없이 떠나는 여행이다.
과연 한 달여 동안 핸드폰 하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상업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된다.
다만 파일들은 모두 구글 드라이브에 옮겨두었다.
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인터넷만 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들은 인생 버킷리스트에 마추픽추와 우유니를 올리지만,
나는 5년 전 마추픽추에 다녀왔고
이번에는 파타고니아와 밀롱가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되고 설렌다.
지금, 나는 애틀란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강의 『흰』을 읽고 있다.
*사진 출처: Unsplash의 Forsaken Fil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