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에 찾은 내면의 평화
"네 남자친구 잘생겼더라!"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연애였다. 우리는 애인이 무엇을 우리에게 잘해줬는지 혹은 어떤 말과 행동이 서운하게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10년 넘게 연애에 대해 떠들었지만, 우리의 사랑이 성숙해진 적은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공부와 휴대폰이 나를 채웠고, 휴대폰 속에서는 피상적이고 빠르게 소비되는 언어가 내 감정을 대신 규정했다.
물론 자라면서 연애 이야기 외에도 성공과 돈, 욕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애를 할 때는 설렘, 집착, 이별에 대한 단어를 배웠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돈, 명예로운 직업, 내가 해야할 노력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갔다. 가끔은 대화에 끼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드라마나 아이돌에 관심있는 척, 다른 사람들에게 주워들은 문장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 대화들은 잔뜩 흩뿌려져 지금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허기,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한것에 대한 패배감, 남이 부러워할만한 배우자와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완전함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자란 아이들은 결국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너네 완두콩 잘컸더라!"
시골로 내려와서는 대화의 결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연인의 표정이나 직업 이야기가 아니라, 씨앗이 움튼 자리와 잎사귀의 빛깔을 이야기한다.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흙에 심은 씨앗이 파릇하게 고개를 들면, 우리는 아이의 첫 미소를 본 듯 연신 “귀엽다”는 말을 내뱉는다. 씨앗 껍질을 밀어내고 꼬물꼬물 잎을 펼 때, 마치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은 듯 가슴이 벅차다. 그러다 시들시들하면 걱정이 된다. 그러다 시들어갈 때면 걱정이 되고, 이웃과 함께 물을 더 줄지, 햇빛을 가려줄지, 벌레를 막아줄 방법을 의논한다. 대화의 중심에는 늘 “내가 무엇을 더 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있다.
농사에는 변수가 가득하다. 고라니가 겅중겅중 밭을 뛰어다니며 양파를 짓밟고, 당근을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벌레가 잎맥만 남기고 잎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럴 때면 속상하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작물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집착하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결국 우리는 씨앗을 심고 수확할 뿐, 그 사이의 과정은 온전히 자연의 몫이다. 그런 시간이 지나다보면 끝내는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농사를 배우며 크는 아이들은 그런 감각을 함께 공유하면서 자란다.
범은 상추를 무척이나 애정한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텃밭이 있는데 그곳을 상추로 대부분 채웠다. 햇빛에 타 죽을까봐 물은 무조건 저녁마다 주고 뚝딱뚝딱 직접 그늘막도 만들어준다. 상추를 딸때도 톡톡 중간부터 자르는 게 아니라 지긋이 누르며 끝부분까지 남김없이 딴다. 상추에 밥을 싸서 된장을 올려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나. 그는 막걸리도 직접 빚는다. 꼬들꼬들 맛있는 밥으로만 빚어낸 막걸리와 상추쌈은 그가 자랑하는 최고의 궁합이다. 밭을 함께 걸을 때 내가 손가락으로 풀을 가리키면 범은 풀이름을 바로 내뱉는다. 거의 모든 산나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 농사 시간에 딴 깻잎은 씻어 선생님께 드리고, 비름을 따와 조물조물 무쳐 밥상에 올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과 가깝게 사는 그의 삶이 부럽고, 또 질투가 난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배웠다면, 자연과 가깝게 살았다면 그처럼 산에 갔을 때 아는 얼굴이 많았을까? 경쟁, 시기심 등에서 파생된 단어에 익숙해지는 대신 파란잎들의 이름과 생김새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그저 부러워하기보다, 내 이상형 목록에 ‘계절별 나물을 잘 무치는 사람’을 추가해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오와린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영은 흙을 사랑한다. 그래서 땅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한다. 흙에 살고 있는 미생물을 죽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작물이 자라기 좋은 땅을 만들지 고민하며 농사를 짓는다. 흙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기 까지 어떤 수업을 들은 걸까? 흙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고 싶다고, 흙에 사는 생명의 집을 부수지 않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산에서 부엽토를 줍는다. 보통 벌레가 있는 썩기 전의 낙엽 밑에 있다. 나는 윽! 하고 한번 소리지른 뒤 겨우 긁어내어 포대자루에 담는다. 몇십년 혹은 몇백년에 걸쳐 쌓여 있는 산의 나이테. 그것을 긁어 밭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시간이 가득 쌓인 흙에는 미생물이 1억마리가 산다. 좋은 흙을 만들려면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최소 10년이 걸리지 않을까? 도시에서 보낸 지난 10년을 떠올리면, 문득 그 시간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라도 흙을 만지고, 씨앗을 키우며 배운 10년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품는다.
도시에서 배운 언어는 늘 경쟁과 비교, 성취와 결핍을 말했지만, 농사와 흙이 가르쳐준 언어는 전혀 달랐다. “줄 수 있을까?”, “함께 자라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내 일상을 채운다. 이제 나는 관계와 감정, 성공과 실패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자연은 내게 완벽해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씩 돌보고 기다리면 언젠가 열매를 내어준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도시의 언어는 내 마음을 텅 비게 했지만, 흙의 언어는 나를 채워준다. 앞으로의 10년은, 흙을 사랑했던 영처럼, 상추를 아끼던 범처럼, 자연을 닮아가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네 마음, 참 잘 자랐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