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이 가난해지는 이유
오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정말 독특하다. 책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오 선생님한테 배우다 보면 어느새 학생들이 책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배움의 시작은 늘 학생들의 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학생이 용기 있게 질문을 한다. 전공부 학생은 대부분 성인이 많아서 그런지 배움에 열정이 있다. 그래서인지 질문도 꽤나 날카롭다.
"어?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처음엔 힘이 빠지지만, 곧 웃음이 터진다. 작은 체구의 선생님이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묘하게 편안하다. 권위를 세우기보다는 솔직함을 택하는 모습 덕분에 우리는 그를 ‘교수님’ 대신 ‘오쌤’이라 부른다. 그리고 언제나 대화의 끝은 이 말로 맺는다.
"그럼 우리 같이 공부해 볼래?"
내가 궁금한 걸 함께 파고드는 선생님이라니. 이런 교육은 처음이다. 1년 동안 스스로 궁금한 것을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가는 경험, 그 과정을 자료로 묶어 책까지 만든다니, 이것만큼 진짜 공부가 또 있을까. 실제로 오 선생님은 [벼의 일 년],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 같은 책을 이미 여러 권 냈다. 더 나아가 한국 최초의 ‘씨앗 도서관’도 이곳 홍동에서 탄생했다.
나는 씨앗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 숙제를 하려고 다이소에서 씨앗을 샀던 날, 부추 씨앗은 까맣고, 케일 씨앗은 번들거리는 보랏빛, 고추 씨앗은 청록색이었다. ‘씨앗은 원래 이렇게 화려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심는 씨앗은 달랐다. 반짝이지도, 알록달록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오 선생님 수업에서 배웠다. 시중 씨앗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노인의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서 색을 칠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포장에는 코팅제에 영양성분과 소독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농약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도 선생님은 딸이 유치원생일 때 이곳에 와서 씨앗을 심는 실습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딸의 고사리 같은 손에 농약 묻은 씨앗을 보고 그런 씨앗을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하셨다. 그 뒤로 농약이 발리지 않은 토종 씨앗을 모으기 위해 할머니들 집으로 마실을 다녔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기꺼이 씨앗을 내주셨다.
“이 씨앗은 내가 여기로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거야.”
혼수 대신 씨앗을 챙겨 오던 시절, 그렇게 내려온 씨앗에는 집집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대대로 이어진 씨앗이 지금 내 손에도 닿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제야 문득 의문이 들었다. 모든 식물은 씨앗을 맺는데, 왜 씨앗을 돈을 주고 사야 할까? 도시에서 살 때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질문이었다.
수업에서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기업이 판매하는 F1 씨앗은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씨앗’이었다. 크고 맛 좋은 품종을 교배해 만들지만, 그 씨앗에서 나온 열매로 다시 농사를 지으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결국 농부는 매년 새 씨앗을 사야 한다. 어떤 해외 기업은 우리 토종 씨앗을 특허 내고, 홍보와 마케팅으로 농부들을 종속시키며 가격을 올린다. 심지어 농약 회사와 같은 뿌리를 둔 기업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쓰이던 화학 무기를 만들던 회사가 지금은 GMO 씨앗을 내놓는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씁쓸했다. 해외에서는 ‘NON-GMO’라며 경계하는 현실과 달리 한국은 GMO 식품이 유통되는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도 새삼 두려웠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다. 홍동의 ‘씨앗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토종 씨앗을 빌려 심고, 그 씨앗을 다시 받아 도서관에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씨앗을 이어간다. 돈으로 거래되는 씨앗이 아니라, 나누고 돌려주는 씨앗. 씨앗을 도서처럼 빌리고 돌려주며 지켜내는 이 방식은, 농부와 공동체가 스스로 씨앗의 권리를 되찾는 길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랫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씨앗은 원래 자연이 거저 주는 생명의 선물인데, 언제부턴가 돈과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씨앗 도서관을 비롯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실천을 보며, 씨앗을 지킨다는 건 단순히 농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공동체를 지켜내는 일임을 깊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