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
어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다시 무소속으로 돌아왔다. 한 달 동안 '학생'이라는 신분에 잠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울타리를 벗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구직'이었다. 집세는 주마다 약 20만 원씩 나가고 식비와 교통비, 통신비 등과 합치면 거의 월 200만 원씩 지출이 나가고 있었다. 한국보다 물가가 비싼 뉴질랜드였다. 게다가 초반에 교육비가 많이 들었다. 수입은 없고 지출만 있는 상황인지라, 먹고살려면 일을 구해야 했다. 어학원을 다니면서 일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딱 한 달만 다닐 거라 그 시간만큼은 영어공부에 초집중을 하려고 했는데... 는 무슨, 개뿔이다. 학원에서 수업 듣는 시간 외에 개인 공부를 해야 내 것이 되는데, 머리로는 알면서도 책상에 앉아서는 딴짓만 하고 있었다. 핑계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집중할 힘이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기분이었다.
물론 어학원을 다니면서 소속감도 느끼고 외국인 친구들도 생겼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고 불안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우울증이 맞았던 것 같다. 원래도 나의 베이스엔 '우울'이 깔려있는데 홀로 해외살이를 하면서 증폭되는 것 같았다. 즐거움도 한순간이었고 쉬고 있어도 피곤하고 힘들었다. 먹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끊임없이 먹어댔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내던지면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에 워홀을 도전한 거였는데,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워홀러의 현실은 외국인 노동자'가 맞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던가. 해외에서 사는 것이 멀리서 볼 땐 마냥 낭만스럽게 보였는데, 막상 살고 보니 한국에서 사는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국에선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지라, 그나마 집세 걱정은 없었는데 해외살이의 현실은 더욱 난이도가 높았다.
한 달 어학원을 다녔지만, 여전히 기초영어 밖에 못하는 상태여서 일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졌다. 한인 잡을 위주로 알아보다가 oo샵에 이력서를 지원했다. 다이소와 비슷한 곳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이었다. 캐셔로 손님을 상대하면서 영어 쓸 일도 있겠다 싶어서 지원했다.
지역마다 체인점이 있었는데 내가 지원한 곳은 알고 보니 제일 큰 매장이었고 쇼핑몰 안에 있는 곳이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님이 끊임없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해외에서 보는 첫 면접이라 너무 떨렸다. 매니저의 첫인상은 아주 깐깐해 보이는데다가 이력서에도 영어 수준을 Beginner라고 솔직하게 기재했기 때문에 뽑힐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합격 문자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땅으로 꺼졌던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갔다. 딱 한 군데만 지원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합격하게 되어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역시 프리패스상이구나 생각하면서 어깨가 한껏 올라갔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면접에 합격하는 것보다 실제 근무가 더 힘들었다. 하루 8-9시간 서서 버티는 시간은 발바닥부터 해서 허리, 어깨 목까지 너무 아팠다. 밝은 조명과 형형색색 물건들에 눈도 쉽게 피로해졌다. 원래 체력도 약한지라 주 3일 근무임에도 쉬는 날은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서 뻗기 일쑤였다. 물건도 너무 많고 손님도 너무 많았다.
기가 쭉쭉 빨리는 와중에 손님들은 자꾸 나한테 물건에 대해서 물어봤다. 물론 그들이 나에게 물어보는 건 당연하지만,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물건의 위치도 다 모르는 데다가 물건의 이름을 전부 영어로 외워야 하니까 머릿속에 더 안 들어왔다. 진열대가 1번 구간부터 21번까지 양쪽으로 물건이 꽉꽉 채워져 있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계산대 근처에도 진열되어 있는 물건이 너무 많았다.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사진을 미리 찍었는데도 도통 외워지지 않았다.
나의 포지션은 계산대나 물건 진열이었는데 손님이 다가오면 제발 나에게 질문하지 않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손님이 모르는 걸 물어보면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을 써야 할 일이 많아서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 한국에 있을 때, 쿠팡 일일 알바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정도의 고강도 업무였다.
그런데 사실 업무가 고강도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물건의 영어 이름을 암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문제는 사람이었다. 매니저는 늘 화가 나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항상 사람을 다그치고 혼내는 말투였다. 본래 성격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첫 직장을 다녔을 때 사수가 생각났다. 완벽주의 스타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히스테릭한 분위기가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첫 직장에서 받은 상처가 글을 쓰며 치유됐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트라우마처럼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채용했음에도, 설마 그것도 모르냐며 공부 좀 하라고 괄시를 당했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이해는 전혀 없고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그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퇴보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텅텅 비고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매니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매니저와 같이 근무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근무일이 계속 겹쳤다. 일을 구한 것에 기쁨과 감사는 잠깐이었고 하루하루 출근하는 것이 괴로웠다. 하루종일 위가 쓰렸던 날, 결국 한국에서 따로 처방해 왔던 위장약을 먹었다. 여기서 계속 일하다가는 위장약을 달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결심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근무를 마치고 다른 직원들이 퇴근했을 때, 매니저한테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3주 만이었다. 그 후 2주의 노티스를 갖고 퇴사했다. 그렇게 첫 알바는 고작 5주의 근무로 막을 내렸다.
그땐 빨리 벗어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다른 일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