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에 밥을 가득 채워서 신나게 먹던 날이 엊그제 같다. 이제는 젓가락으로 조금씩 밥을 떠서 먹는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먹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전에는 술렁술렁 밥을 넘겼다면 삼십 번은 씹어 먹으려고 한다. 마치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직장 다닐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속도를 맞추다가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는 온전히 나의 속도에 맞춰서 밥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생겨버린 습관은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한 숟갈만 더 먹을까? 아니다. 그만 먹자. 밥통을 노려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놈의 식욕은 줄지를 않는다. 분명히 배가 고픈 상태가 아닌데도 계속 먹고 싶다. 입이 심심하다. 소화가 잘 안 되면 식욕이 없어서 힘들다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식욕이 넘쳐서 힘들다. 차라리 식욕이 줄었으면 좋겠는데. 왜 이런 건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원인은 가짜 배고픔, 감정적 허기였다. 그에 대한 증상은 식사한 지 세 시간이 안 됐는데도 갑자기 배가 고프고, 떡볶이나 초콜릿 등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심해진다고 한다. 먹는 것을 멈출 수 없는 폭식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보게 되었다.
그 사람들의 고민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폭식을 끊고 싶지만, 유혹을 이겨낼 수 없어서 다시 먹게 되고 자괴감에 빠지면서도 또 먹고 계속 먹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 것은 오래된 식습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심리적 허기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생각해봤다. 무엇을 먹어도 채울 수 없는 나의 빈 공간은 무엇일까.
첫 직장에서 보낸 일 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계약 기간이었던 일 년을 마치고 퇴사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실 퇴사 후 세워놓은 계획은 없었다. 단순하게 여행을 다녀와서 리프레쉬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여행은 어디로 가면 좋을까. 과감하게 해외여행을 가볼까. 여기저기를 검색해보고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면서 오랜만에 설레고 들떴다. 나도 이제 곧 가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터지면서 여행은커녕, 집에 박혀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막연한 계획이긴 했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하게 어그러졌다. 긁어모았던 의욕은 땅속으로 꺼지고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던 중, 종종 조언을 구하는 목사님과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 중에 대뜸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셨다. 그 물음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내 마음에 물었다. 아닌 것 같았다. 첫 직장생활을 하면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 동안, 나는 많이 위축되고 찌그러져 있었다. 하루가 끝나면 고생이 많았다고 나를 응원해주기보다 ‘너는 잘하는 게 있긴 하니’라고 스스로 깎아내리기 바빴다. 지독한 열등감 속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목사님은 대화를 마치고 <나를 돌보는 게 서툰 어른을 위한 애착 수업>이란 책을 빌려주셨다. 제목부터 와 닿았다. 나 또한 나를 돌보는 게 서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안정한 애착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말하며 애착과 안전 기지를 강조한다. 애착은 양육자나 특별한 사회적 대상과 형성하는 친밀한 정서적 관계를 말한다.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한테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오빠는 첫째여서, 남동생은 막내여서 나보다 많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한 엄마에게 받는 사랑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아빠한테는 많이 혼나면서 컸고 나를 꾸짖는 말들이 마음에 상처로 남아 더 위축되기도 했다. 사람에게 쉽게 정이 들고 의지하는 반면, 질투가 많았고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피곤하게 만들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가득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누군가에게 애정을 원하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생수가 아닌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나는 것처럼, 나의 빈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갈증이 났다. 집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직장에서는 상사로부터.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본인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칭찬에 인색했다. 나를 안아주거나 다독이지 않고 코너로 몰고 갔다. 그 코너 끝에 지쳐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상처투성이에 여기저기 깨져있는,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울 수 없는 깨진 그릇. 그것이 내가 본 나의 모습이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지나쳐버린 나를 이제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