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이에요, 끝이 있다는 거잖아요. 나는 그게 너무 감사해요."
칠십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양육이 끝나지 않은 지인이 내게 해준 말이다. 그분은 미혼부인 큰 아들의 딸을 돌 때부터 양육해오고 있다. 정년 퇴직한 남편을 비롯해 미혼인 두 아들, 그리고 미혼인 장남의 딸까지. 성격이 꼼꼼하고 천성이 부지런하며 책임감 강한 그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머리부터 감고 매만지며 단정한 차림으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손녀의 등교를 돕고 다섯 식구 살림살이로 하루 24시간이 늘 부족하다. 당연히 아플 새가 없다. 아파도 아프면 안 된다. 가끔 나는 까칠한 남편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딸아이 때문에 힘들다가도 그분을 생각하면 힘들다는 생각이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봤다면 아니 한 번씩 간절하게 해 봤다면 '죽음이란 축복'의 의미도 공감되고 이해될 것이다. 나도 그리스 로마신화 속의 잠의 신'힙노스'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업고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냥 곱게 가는 잠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최근 타나토스의 역동, 그것이 미쳐 날뛸 때는 언제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열아홉인 딸의 친구의 친구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나서다. 아이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전해 듣기로 남자아이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분명 억울함이 있을 수도 있고, 부모나 어른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길이 열릴 수도 있는데 혼자 2시간 동안 극심한 두려움, 공포, 부담감, 책임감에 판단이 흐려지고 불안에 압도되어 즉각적인 도피의 방법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
사람은 부담과 책임감이 극으로 치달을 때, 불안에 압도당하면 강렬한 타나토스의 역동에 휘둘리게 된다.
또, 에릭슨이 말한 생애 발달 단계에서의 과업, 그 과업에 대한 성취와 책임이 맞물릴 때도 그러한 것 같다.
청소년 아이들이 학업성취도에만 과하게 몰두하다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학생과 학업에만 집중할 때. 이 삽 십 대 청년들이 사랑과 취업 문제로 괴로워할 때, 양육 중인 부모가 자식 양육에 대한 자괴감으로 몸부림칠 때. 40대 한창 일할 나이에 사회적 역할과 기능, 기여할 기회를 강제로 상실당하며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할 때 또는 감당해야 할 책임이 너무나 무겁고 위태로울 때, 그리고 60대 이후 자기가 살아온 지난 세월 속에서 자신의 과오나 실수, 불행을 수용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원망과 남 탓을 할 때. 그들은 모두 한 마디로 딱, 죽고 싶을 것이다.
공통적으로 그 안에 '책임에 대한 부담'이 눈에 띈다.
우리 집에서는 어떤가? 남편은 업무 책임자로서의 책임과 부담이 너무 크고 무거워 타나토스의 강렬한 위협이 있고 위태롭다. 나는 여전히 양육의 책임과 자괴감으로 고통스럽다. 아이는?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만 막상 자기 세계로 돌아서면 부모의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행복해 보인다. 자기 삶과 세계를 즐길 줄 아는 아이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중요한 아이! 정말 밉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