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의 막내인 남편이 장남인 큰 형님의 전화를 받지 않은 지가 8년이 넘었다. 돌아가신 시부모님의 제사나 산소 벌초에 관한 용건, 그래서 돈을 걷어야 할 일이 아니면 딱히 연락 올 일이 없었다. 아니, 딱 한번. 큰 시숙님은 내게 전화를 해서 불같이 화를 내셨다. 둘째 제수씨도 그렇고 막내 제수씨도 그렇고 다들 나이가 몇인데 형제간에 사이가 안 좋으면 마누라들이 나서서라도 찾아가자고 하고, 밑에(지방에) 사는 형님한테 와서 제사 준비도 돕고 해야지 뭐 하는 짓이냐고. 다들 나이를 어디로 먹었냐고.
맞는 말이고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데는 너무나 긴 세월의 아픔이 있었다. 남편은 큰 형님의 둘째 딸이 결혼할 때도 안 가고 집에서 술을 펐다. 도리상 나만 그 자리에 참석했을 뿐.
남보다 못한 형제지간, 아니 차라리 남이었다면 이토록 애증과 갈등이 깊게 오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외면하고 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상처에서 보이지 않는 피고름이 흘러대는 게 내 눈에는 보였다. 서로를 싫어하다 못해 얘기만 나오면 억눌렀던 분노가 여지없이 폭발하고 대지진 후에 이어지는 여진처럼 며칠이고 감정의 후폭풍이 이어졌다. 중간에서 어설프게 화해를 시도했다가 멍청하게 내 발등을 찍었다고 후회한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것도 아버지 뻘이나 되는 큰 형님한테 막내가 그래서 되겠냐고 누군가는 훈수를 둘 것이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남들한테 일일이 말 못 할 절절한 사연이 너무나 많다. 어느 상담사의 말이 맞다.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파고 파다 보면 한 집안에는 비밀이 너무 많다.'던 그 말.
남편이 큰 형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4년 전, 시아버님의 장례식 때였다. 시아버님마저 돌아가시자 8남매 중 7남매는 아무도 장남인 큰 시숙님과 왕래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님의 첫제사 때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4년 후 큰 시숙님은 지병이던 폐질환에 폐렴이 겹쳐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막내 제수씨인 내 전화번호를 외우기라도 했는지, 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를 졸라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용건은 치료비가 많이 나오니 형제들과 의논해서 병원비를 보내든지 아니면 아버님이 남긴 반지하단칸방의 전세보증금 3천만 원(나중에 7남매라도 찾아보기 쉽게 수도권 납골당으로 이장할 계획)에서 돈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큰 시숙님의 진의는 한마디로 갈급한 형제애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7남매에겐 이번에도 돈 욕심, 아무리 욕심이 나도 입 밖으로 꺼내선 안될 말이 아버지의 초라한 유산, 그 마지막 3천만 원에 대한 언급이었다. 게다가 그 돈은 사용 목적이 이미 7남매에겐 암묵적으로 합의된 돈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큰 시숙님의 그 거칠고 미숙한 표현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환자실에서 걸려온 그 마지막 전화와 용건은 7남매의 문병 계획을 무산시키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정을 떼는 사건이 되었다. 덩달아 나는 전하지 말았어야 했나 싶고 나의 경솔함을 탓하며 죄책감과 압박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은 부고 소식이 와도 자기는 가고 싶지 않다고, 이대로 영원히 안 보고 소식 끊고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마음을 추스르며 그럼에도 사회적 가면을 쓰라고 했다. 그 사회적 가면을 쓰지 못하는 것과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섯 살 아이와 어른의 차이라고. 그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날 저녁(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3주 만에) 진짜 부고 소식을 듣게 됐다. 유가족은 병원에서 들은 말이 있었어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지 우왕좌왕,부고장 전달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락도 제대로 안되고 급기야 그날 밤,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나를 비롯해 몇몇은 우리가 조문 오는 걸 조카들과 조카사위들이 거부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