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달려온 과정을 대충 알고 노력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도 안다. 첫 책을 단기간에 10쇄까지 찍어내는 그의 현실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먼저 책을 내고 2 쇄도 어렵게, 후속 책은 2 쇄도 못 가고 있는 내 처지와 확연히 비교가 됐다. 비교가 얼마나 사악한 일인지, 쓸모없는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면서.
그래서 스스로 인생 좌우명이랍시고 '자기 자비'를 선언하지 않았던가.
'자책하지 말자/ 기대치와 기준을 낮추자 / 자기편이 되어주자 / 비교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생각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이 찔렸다.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축하해'라고 말해주지 못하는 내 안의 내가 있다.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더니 나 혼자 나만의 세상에 갇혀 밖에서 들리는 환호소리에 속앓이를 하던 나는 이런 내 마음이 영 불편해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엄청 배 아파. 그래도 축하해. 소식 보자마자 사실 엄청 배 아팠고 대뜸 축하해 주지 못하는 내 안에 내가 있는 걸 느꼈어. 그래도 축하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애썼어.'
그렇게 해줄 말을 정리했다. 그런데 안 받는다. 더 배가 아팠다. 문자로라도 전화를 못 받는 상황임을 알려주지 않으니 무시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솔직히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다만, 이쯤 되면 나는 stop 해야 한다. 그 사람을 향한 내 생각과 감정을 말이다.
<감정식당>을 쓴 이서원 교수는 '열등감'이란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열등감은 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감정이다.'
적절한 열등감은 나에게 긍정의 자극이 된다. 식었던 열정에 불을 붙여주고 새롭게 동기 부여도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마음은 뭘까?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야 고춧가루를 뿌리고 만다는 심정이 '시기심'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고춧가루를 뿌리고 싶지는 않다. 노력한 걸 아니까. 내가 못하는 걸 죽도록 애쓰며 해왔으니까.
시기심이 아닌 긍정의 열등감이 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내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 남의 세상만 넘보고 있는 형국이다. 딱, 지금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