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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Aug 26. 2024

내가 잠든 사이, 우리 엄마는

심장박동기를 달고 여든을 앞둔 우리 엄마와 온몸의 뼈까지 전이가 된 암환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6개월, 아버지의 정기 진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내가 병원을 모시고 다니며 보호자가 되어드릴 수 있어서 나는 기쁘다. 전혀 귀찮지 않고 기꺼이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어서 좋은 다른 이유도 있다.

나의 부모님이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직접 거동할 수 있는 남은 세월을 나는 5년 이내로 본다. 그동안 나는 부모님과 함께 할 기회가 있다.


-하룻밤 정도는 이럴 때마다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

-병원에서 피검사 후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진료를 기다리며 카페 커피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직접 배웅하며 기차의 좋은 자리를 골라 태워서 내려보낼 수 있다는 것.


맏딸이라 내가 기꺼이 나서서 하지만, 이것이 동생들한테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동생들은 매번 충분히 나를 배려해 준다. 언제나 미안해하고 눈치껏 행동하며  늘 고마워하니까.  

 

결혼 후 10년간 시어머니, 어머님 돌아가시고 6년은 시아버지. 16년간 나는 항상 시부모님이 우선이었다. 우리 부모님 보다 20년쯤 차이가 나고 열로 하신 데다 지병이 있으시니 늘 먼저였다. 친정 부모를 우선으로 챙기지 못해 혼자 속상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할 수 있으니. 다행히 남편이 모든 걸 이해해 주고 지원해 주니 더없이 고맙고 기쁘다. 부모님도 작은 딸 보다 큰 딸네가 맘이 더 편하신 것 같다.


그렇게 부모님이 1박 2일을 머물다 내려가시는 날, 함께 영화도 보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짬뽕도 먹었다. 그리고 기차역으로 가면서 간식으로 '찐 옥수수'를 사러 들렀다.


역사 지하, 백화점 식품관 앞 한쪽 구석에서 날마다 삶은 찰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가 있다. 푹 삶아서 가져오시는 터라 아주 쫀득하게 맛이 좋다. 그래서 자주 사 먹는데 엄마 아버지 내려가시는 길에 간식으로 사러 갔다.

알이 꽉 차고 실한 옥수수 2개 한 묶음에 2천 원. 엄마, 아버지는 연신 싸다고 이야길 하신다.

촌에서 농사짓다 보니 이렇게 먹거리 하나로 나오기까지 그 손길이 얼마나 많은지, 고된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껍질 벗기고 수염 떼고 푹 삶아서 그 뜨거운 걸 건져낸 후 일일이 소포장, 그리고 보따리 싸서 파는 데까지 끌고 오르내리길 몇 번. 더구나 이 찜통 무더위에 말이다.


찐 옥수수를 넘겨드리고 기차역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데 엄마의 한 마디가 귀에 콕 박혔다.


"에이고, 그래도 누가 저 할매를 안쫓아내서 다행이다. 거 앉아서 장사 하두룩 내두니까 좋구마. 나는 고마 쫓기나니라고 바빴는데."


'응?'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뒤에 선 엄마를 향해 내 뒤통수가 먼저 반응했다. 뒤통수가 확 당기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쫓겨났다니?"

"옛날에 내가 안그랬나. 밤마다 옥수수 삶고 고구마, 가을에는 알밤 삶아가 밤마다 만날 나와서 안 팔았나.

그러마 그때 방림방적 거 공장 아가씨들이 밤 10시가 교대 시간이라. 그래가 고때 되마 막 나와가 간식 먹는다고 '이모 가지마요. 이따가 올테니까 가지 말고 기다려줘요.'그카미 와서 어시(매우) 마이 사가고 안그랬나. 그런데 팀장인가 조장이 그키 못나가구로 머라 캤단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또 돈 가지러 기숙사 갔다 와야 되고 이칸께. "


어렴풋이 알기로 엄마가 서울로 올 때  쌀 세 가마니 가져온 게 전부였다고. 그래서 사글세 단칸방을 얻고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서울살이를 시작했다는 것까지는 안다. 그때가 1986년 겨울.

그러다 어느 날 밤 고구마를 삶아서 팔러 나갔다가 막내 여동생을 잃어버렸는데 다행히 그날 밤 경찰도움ㅇ로 찾았다는 에피소드는 흘려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내가 흘려듣는 바람에 내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새겨듣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웠으니 말이다.


그때 내 나이 열셋, 넷 정도였으니 우리 엄마는 고작 마흔 하나, 둘. 지금의 나 보다 10년도 젊을 때였는데 나는 지금 내 나이에도 엄두가 안 난다.  우리 엄마는 참 억척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나는 공부한다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기에 학교 다녀오면 독서실로 갔다가 밤 12시나 돼야 잠을 자러 들어오곤 했다. 어차피 머물 공간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내 엄마의 하루 일과를 잘 몰랐다. 아니 하루하루 그 억척스럽고도 고단했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키우고, 먹이며 살아왔구나!'


오십이 너머서야 이걸 안다. 자식이 제 부모의 수고로움을.

열아홉 우리 딸도 오십이 되면 부모 마음을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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