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봄 Feb 13. 2024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주겠다던 약속

20년 전의 약속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줄게"라던 그 흔하디 흔한 말.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진부한 개수작.

설거지 한 번 관심 있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그래도 자기가 뱉은 말의 씨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상하 함께 가전 교체를 라면서 남편은 로봇청소기를 들여주었다. 설거지 눈치 주지 말라며 식기세척기를 넣자고 해도 그간 내가 반대했었다. 그러다 이번엔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다. 식기세척기는 처음에 들여야지 안 그러면 주방 구조를 바꿔야 해서 중간에 들이기는 곤란하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청소에 대한 강박이 있던 친정아버지. 그 영향력은 내게 차라리 좀 지저분해도 맘 편히 살자는 길을 택하게 했다. 아래 여동생은 아빠처럼 지저분한 걸 못 견뎌하지만. 여하튼 나는 청소에 게으른 편이다. 오십이 다 된 주부가 깔끔하게 살림살이 정리며 집 청소가 매우 서툴다. 꼼꼼하지도 못하고. 로봇은 나 보다 낫다. 나름 '꼼꼼 청소'란 것도 할 줄 안다. 어떤 날은 같이 살림하는 사람으로 그 마음 알기에 특별히 '지그재그 청소'로 일을 줄여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설 명절 연휴를 마치고 새 한주를 시작하며 오늘도

청소기를 돌리는데 문득 20년 전의 남편의 말이 퍼뜩 떠올라 피식 웃었다.

남편은 얼마 전 집들이에서 친정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봄이 막내인 저한테 시집간다고 걱정 많으셨죠? 저희 부모님이 워낙 열로 하시고 편찮으시고. 도와주실 형편도 못되고요. 그래도 이제는 봄이가 손에 물 안 묻히고 살 수 있어요. 제가 로봇 청소기에 식기세척기에 워시타워까지 다 넣어줬거든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남편에게는 20년 전  내 친정엄마의 걱정 어린 시선이 마음의  빚처럼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안쓰러운 사람.


20년의 시간.

따스한 봄볕과 꽃샘추위도 스무 번, 한여름의 타는 무더위와 폭풍우도 스무 번, 가을의 풍요와 가을장마도 스무 번, 함박눈의 낭만과 혹독한 추위 속 서글픔도 스무 번.

그렇게 우리가 그 시간을 함께 했었다. 돌아보면 손에 물 묻히는 거? 사는 게 '그 까이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씨 변덕 같은 마음의 변화가 더 고되고 힘들었을 뿐.

그래도 예까지 잘  왔다. 그리고 오늘 참고 이해하고 견디며  잘 지내온 덕분에 요즘은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이렇게 내 손으로 내 몸을 챙길 여유도 생기고 말이다.

호르몬검사로 병원을 찾았다가 미처 알지 못한 내 상태, 고지혈! 약을 먹어야 할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한 달간의 식단 변화로 나는 고지혈 정상 범위로 내려왔다.

청소는 남편 손(결국 로봇청소기 할부 갚아줄)에

맡기고  오늘은 좀 더 나를 돌봐야겠다.

29년 전, '고무장갑이 있다 이거지?'생각했었는데

그는 쭉 가슴에 담아 온 약속이었음에 무한 감사를 보내고픈 날이다.



 


이전 18화 내가 잠든 사이, 우리 엄마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