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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Jun 26. 2024

24. 죽어서야 풀릴 매듭

존재와 부재를 가르는 1박 2일을 보내고 2


'이건 아니지...'싶어 내가 새벽, 날이 밝기를 못 참고 큰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빈소가 어디냐고. 혹시 어젯밤부터 조문받고 있냐고. 


그제야 형님이 딸한테 부고장 보내라고 했는데 못 받았냐고 하셨다. 돌아가신 큰 시숙님의 바로 아래 동생인 큰 누나한테 대표로 보냈는데 전달이 안 됐냐고. 그렇게 부랴부랴 전달받은 부고장에 적힌 주소지로 방향을 잡고 그날 아침 일제히 7남매가 출발했다. 생전에 미뤄온 안부 인사 대신 영원한 작별을 고하러.


5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장례식장. 한눈에 봐도 시골 동네 어르신들로 보이는 문상객들이 몇 테이블 보이고 아직 친척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제만도 8남매건만 빈자리가 많아 썰렁한 빈소.

막내인 남편이 들어서자 기다렸던 사람을 대신 마주한 큰 형님(형수)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마지막 전화 내용을 남편과 형제들에게 퍼뜨린 죄인인양 영정 사진 속의 큰 시숙님 얼굴을,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큰 시숙님 영정 앞에 큰 절을 올리고, 마주한 상주들. 시댁 두 조카와 조카사위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바로 마음을 열어 반겨주었다. 오랜 세월이 무색할 만큼.


큰 형에 대한 오랜 서운함과 가족사 안에서 막내가 느낀 깊은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장례식조차 가고 싶지 않다던 남편이다. 하지만 막상 빈소에서 영정사진으로 마주한 큰 형님의 모습은 그에게도 사뭇 충격이긴 했나 보다.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다. 저녁 늦게까지 빈소를 찾은 친인척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곤 하던 남편. 남편의 술잔이 채우지고 비워지기를 거듭하더니 어느 순간 남편은 주량을 넘어서게 됐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하던 차. 식당 한 귀퉁이 앉아있던 남편이 다시 빈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신경이 쓰여 뒤 따라갔더니 영정 앞에 혼자 소주잔을 올리고 큰 절을 하더니 영정 앞에서 한참 혼잣말을 이어갔다. 속엣말을 다 꺼내놓는 것도 같다가 사과를 하기도 하다가 유가족 의자에 앉아 한참을 영정 사진만 응시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 행동을 밤새 반복하는 게 아닌가. 반은 술주사 같기도 하고 반은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오랜 매듭을 푸는 듯도 했다. 


겨우 두 시간 눈을 붙인 남편이 술에서 깰 수나 있을까? 했는데 새벽 5시가 넘어가자 "가야지, 가야지." 하며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자기 소지품을 챙겼다. 숙취인지 취기인지 모를 상태로 향한 승화원. 형님의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남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는 순간 마음이 무너지더라'라고.

어쩔 수 없는 피붙이,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하고 매몰차게 외면했다가도. 


봉안당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온 후 남편은 정확히 이틀간 극심한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거푸 이틀을 밤마다 소주 한 병을 놓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러더니 내게 묻는다.

"혹시 기억나? 제망매가라고"

"응"


    생사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제 아무리 원수지간인양 증오에 불타오르는 듯해도 피붙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피붙이의 힘은 아무리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끈. 그래서 말 그대로 애증인가 보다.


일상으로 돌아와 우리가 맞이한 오늘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누군가의 내일이다. 

그토록 살고 싶었던 누군가의 내일. 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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