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 글쓰기
숨 가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에 나는 논술 학습지 교사를 시작했다. 숨 가쁜 무더위처럼 숨 가쁘게 청춘의 나날이 지나가던 때였다. 여름의 무더위처럼 쉴 새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던 날들이었다. 아침 미팅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지속되던 수업 일정들... 이 모든 걸 감당하는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았다.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일이 있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간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거였다. 논술 학습지 교사는 내 인생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지만 책을 꾸준히 접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에 선택했다. 수업은 적당히 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회사 소속이 된 순간 회사에서 원하는 실적을 맞추는 교사가 되어야만 했고, 수업량을 적당히 조절해서 맞추다 보면 한 달 교통비도 빠듯해지는 상황이 왔다. 고된 일정을 늘 소화해야만 하는 내게 있어서 책을 읽는 시간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은 오아시스를 만나는 시간과도 같았다. 하지만 늘 좋은 아이들과 학부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전에 양면이 늘 존재하는 것처럼... 요령 없는 나에게, 그런 내가 싫어서 독설을 퍼붓고 돌아서는 어머니들과 내 앞에서 욕설을 하는 몇몇의 아이들...그런 일들을 겪은 날은 집으로 돌아와 남몰래 펑펑 울기도 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문득문득 아팠던 그때의 일들이, 휴지처럼 구겨지고 찢겨서 작아질 대로 작아진 나의 초라한 모습이 머릿속에 리플레이되곤 했었다.
요령 없고, 밤을 새워서라도 수업 준비를 하는 나에게 있어서 유치원, 초등학생보다는 중고등학생들이 더 잘 맞는 듯했다. 4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초등학생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중고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학습지는 중학 2학년 과정까지 밖에 없어서 학년이 높은 친구들만 따로 떼어서 과외로 전환을 했다.
나는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에 논술학원으로 유명한 곳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을 다녔다. 내가 사는 곳은 청주여서 거리가 멀었지만 논술 쪽으로 보다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에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다녔다. 일주일 동안 정해준 도서를 읽고 교재를 만들고, 1년 수업 계획안을 만드는 수업이 어렵고 고됐지만 나와 함께 수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다녔다. 또한 대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현장 수업에 관련된 공부를 한다는 점이 매력 있었고 책을 제대로 읽고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과외를 시작하면 회사 다닐 때와 다르게 좋은 일들만 기다릴 거라 기대했다. 회사 다닐 때보다 책 읽고 공부할 시간,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도 넉넉해서 수업도 많이 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설 수업은 그 어떤 수업이라도 진심보다는 요령이 더 중요해 보였다. 상담 능력이 부족하고 거짓말을 못 하는 나보다 카리스마 있고, 설득 잘하는 선생님들을 어머님들도, 학생들도 선호하는 듯 보였다. 과외로 전환한 지 2년이 지나고 수업은 반으로 줄었고 아이들을 강하게 잡지 못하는 선생님이 늘 불만이었다는 이야기를 몇몇 어머님들로부터 들었다.
더 이상 미래도 보이지 않았고 논술 수업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싫어졌다. 논술 수업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수강료 10만 원을 내고 자격증을 수여하는 논술 스터디 팀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모 대학원 논술 학과장님과 교수님, 모 학원 원장님도 알게 됐다. 그동안 수업했던 교안을 공유하고 발표하는 방식으로 스터디가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터디를 진행하는 교수님께 칭찬을 받았고 교수님 추천으로 ‘수석 강사’로 발탁이 되었다. 그 후 겨울 방학에 스터디 팀에서 알게 된 원장님의 부탁으로 한 달간 ‘역사특강’도 나가게 되었다. 지난 6년이라는 시간이 보상되는 날이 내게도 오는 건가 싶었다. 불안하기만 했던 미래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원장님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논술 학원을 크게 차릴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지금의 학원을 내게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학원이 잘 운영되고 있고, 한 달 못해도 300만 원 이상을 벌고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별 다른 의심 없이 내게 또 다른 큰 기회가 주어지는 걸로 생각했다. 학원 운영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 원장님은 그동안 자신이 투자했던 학원 운영비와 학생들까지 합한 금액이 5000만 원 정도인데 300만 원을 깎아서 470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고, 우선 선금 470만 원을 2일 이내에 계좌 이체시켜달라고 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나는 빠듯한 월급이었지만 한 달 생활비 30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적금 통장에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모아 둔 돈이 꽤 되어서 그 돈으로 학원 운영을 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상의를 드렸다. 그러나 두 분 모두 강하게 반대하셨다. 원장님이 내게 학원생이 몇 명인지, 몇 과목을 개설하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이 의심된다고 하셨다. 학원 운영에 관한 일은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었다. 며칠을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 없던 내게 결정적으로 한 사건이 터졌다. 원장님이 스터디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함께 스터디를 하는 선생님들에게 인센티브를 선생님 9: 본사 1로 결정한 사항을 나에게 대신 전하라고 했다. 대신에 평생교육원이나 방과 후 수업 개설에 관한 모든 것은 각 선생님들이 알아서 홍보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원장님을 중심으로 한 ‘소장 단’은 수업 개설에 관한 홍보에서 빠지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자격증을 따려고 했던 것도 원장님을 중심으로 수업을 개설해 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무척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큰 소리 내지 않고 원장님 말대로 스터디 선생님들에게 이 말을 전했다. 선생님들은 크고 작은 불만의 소리를 냈다. 원장님을 믿을 수 없으니 스터디를 지속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대부분 선생님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던 중 한 선생님이 원장 선생님에게 전화로 따지는 일이 발생했고 원장 선생님은 “유니 선생님이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말을 좀 이상하게, 잘못 전달한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계획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났다. 인센티브에 관한 이야기는 교수님도 초대되어있는 단톡 방에는 절대 공지하지 말라는 지시 사항도 있었는데 이것도 불리한 상황이 왔을 때 내 실수인 것처럼 말을 바꾸려는 것 같아서 인센티브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단톡 방에 올렸다. 그 후 일하는 시간 내내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모든 일들의 정황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한참을 이렇게 피곤한 일들에 시달린 후, 나는 스터디를 나왔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에 원장님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큰돈을 들여서 원장을 맡은 것도 아니라 내게 큰 손해는 없었지만 그동안 노력하고 기대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내게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산 거지? 앞으로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자 서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쌓였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펑펑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며칠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작지만 내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 한글’ 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이 많이 좋아졌다.
논술 수업을 하면서 며칠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들은 늘 존재해 왔다.
그때마다 아파하지만 말고 당연한 인생의 주기라고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터놓을 수 없었던 마음의 아픔도, 슬픔과 행복, 찬란한 찰나의 순간도 모두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든 작든 내 삶의 경험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나를 존재시키고 있다.
절박한 마음이 나를 쓰게 했으니까 절박한 청춘도 나를 일으키게 하는 날이 분명 오겠지...
아니,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글을 쓰면서 나를 온전하게 들여다보게 되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은 내 삶을 버티는 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