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기억을 남긴다.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국밥 가게를 운영하면서 나를 소개할 때 "아, 그냥 배달원입니다."라는 멘트를 많이 써왔다. 어린 시절에도 배달 알바를 종종 했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내 직업을 오픈한다는 게 솔직히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나는 원래 비를 가리지 않고 흠뻑 맞는 것마저 좋아했었다. 군 시절에는 비만 왔다고 하면 쇼트팬츠 하나만 달랑 입고 구보 뛰는 것을 좋아했다. 식당을 시작하고부터는 솔직히 비가 싫어졌었다. 날씨가 좋을 때 주문을 많이 해주지 왜 비가 쏟아져야만 정신없이 주문이 쏟아질까? 하며 한탄도 했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일들이 많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린 날 여름, 본인 우산이 있었음에도 어디론가 숨겼는지 던져버렸는지 내 우산 안으로 쏙 하고 들어왔던 소녀도 있었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녀도 내게 남긴 것이라고는 투명한 우산 하나뿐이었다. 그 우산을 침대 머리맡에 오랜 세월을 걸어뒀더니 지켜보던 어머니가 한 말씀하시고는 했다. "이 우산은 뭔데 쓰지도 않고 머리맡에 두고 있냐?"라면서 말이다. 그때 나는 "아, 어머니 이거는 제 우산이 아니라 언젠가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서 절대 절대 건드시면 안 됩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었다.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듯 울산에서 무턱대고 장사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배달 대행 기사로써 제법 오랜 시간 일했었다. 지금도 가끔 콜이 너무 밀릴 때면 몇 개씩 빼주고는 한다. 아무쪼록 기사로 있을 때 그날도 엄청난 폭우가 왔었는데 피자 가게에 픽업을 하러 문을 열고 들어갔었다. 주문이 밀려 있었는지 내 뒤로도 다른 기사님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걷는 게 너무 많이 불편할 정도로 다리가 어긋나 있었고 불편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들고 갈 피자와 큰 콜라가 나왔고 음식을 두 손으로 들고 돌아서 가게를 나가려고 했을 때 내가 문을 열어낼 손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 기사님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뒤뚱뒤뚱 가게 문을 활짝 열어줬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더 씩씩하게 말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비가 많이 옵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감사합니다." 피자를 배달 통에 싣고 출발하는 순간부터 눈물이 흘렀다. 빗물에 씻겨 아무도 몰랐겠지만 너무 진한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비가 올 때면 항상 그 기사님을 생각했다. 잘 지내는지 다른 일을 찾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 가게에 단골로 오는 예의 바른 기사님이 있는데 어느 날 다리가 불편한 그 기사님을 데려온 게 아닌가? 아마도 나를 못 알아봤겠지만 궁금했었는데 여전히 배달을 하고 계셨고 더 씩씩한 사람이었다. 4명이서 왔었는데 국밥류만 4그릇 주문하길래 맛보기 수육을 넉넉하게 그릇에 담아 서비스로 내어 드리며 말했다. "오늘 제가 맛보기 수육을 드리는 건 옆에 계신 기사님께 감동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00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들고나갈 때 문을 열어주셨는데 그때 너무 큰 감동을 했습니다. 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비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고작 빗방울이 모여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비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빗길 때문에 미끄러진 사고가 아니라 빗물에 잠겼다는 것이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버린 것이다. 뉴스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고인의 남편이 말하기를 너무 착한 아내였다고 했다. 자기 것까지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개인의 샤머니즘일지 몰라도 나는 착한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때 천국의 간부 자리가 났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의 삶도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고 죽고 난 다음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 지구가 종말 할 때까지 흔적도 없이 흘러갈 것이다. 훗날 해답을 알 수 있겠지, 그때는 나도 고인이니 고인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이모님이라 불러보고 싶다. "이모님, 비가 오면 이모님을 아주 가끔 생각하며 이리저리 살다가 저도 와버렸네요. 마음고생 많으셨죠?"
폭우가 가장 많이 쏟아질 때는 사실상 와이퍼가 없는 오토바이 배달원의 시야가 깜깜한 회색으로 덮인다. 다른 배달원은 모르겠지만 폭우가 내리는 날은 두통이 심해진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목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한창 바쁜 시간 가게로 돌아오는데 가게 앞 횡단보도 중간부에서 무언가 떼구루루 떼구루루 굴러가는 현상을 목격했다. 비상등을 켜고 최저 속도로 뒤차량을 통제하며 다가갔다. 그랬더니 흰색 고무신을 신은 어르신 한 분이 만취해 쓰러져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평소 해오던 이미지 트레이닝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상등을 킨 오토바이로 차선 하나를 막고 가차 없이 어르신을 들어 인도까지 옮겨드렸다. 초보 운전자였다면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굉장히 높은 수준의 폭우였고 또 다른 중국집 배달원이 경찰에 신고해 출동한 경찰관이 어르신을 태워갔다. 인명사고의 최초 목격자 최초 신고자는 아마도 배달원이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고 현장에는 항상 배달원이 있었다. 또한 도로에서만큼은 판단이 빠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 오는 날의 배달원은 비라는 출근 필터가 거친 사람들이기에 그날 하루만큼은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토바이에 올라탄 날부터 우산을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굳이 안 쓴 것도 있다.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끝까지 좋은 것이었다. 중간에 비가 너무 밉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전히 좋다. 비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자주 권유하는 것이 있다. 괴롭거나 답답할 때, 생각이 많을 때 우산을 미처 잃어버린 사람처럼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미친 사람처럼 비에 홀딱 젖어보라고 말이다. 더러운 골목 누가 토를 하든 노상방뇨를 하든 음식물 쓰레기가 흘러나오든 한 번의 비로 충분하듯이 말이다.